제2차 세계대전 간 소비에트 군사술 (작전술과 전술의 발전)
군사 사상ВОЕННАЯ МЫСЛЬ №9 2009

퇴역 대령
군사과학 부박사кандидат
검토중인 기간 동안 작전술은 군사술術의 자주적 분야로 존재하였으며 군армия (1940년 이후 전선фронт도) 작전의 준비와 수행에 대한 문제를 포함하였다1.
전쟁 간 전선은 무장력의 가장 강력한 작전적-전략적 대부대объединение였으며, 평균적으로 제병협동군 3-9개, 전차군, 항공군 1-2개, 독립 기계화 (전차) 군단 1-4개, 기병 군단 1-2개, 포병 사단 1-2개를 예하에 두고 있었다. 전선은 병력 20만-100만 이상, 소총병 사단 30-70개, 전차 및 SAU 600-1200대 (경우에 따라 최대 3천), 포 및 박격포 4500-7000문 (경우에 따라 1.4만), 전투 항공기 600-900대에 달하였다2.
제병협동군 및 전차군은 지상군의 작전적 대부대였다. 전쟁 초 제병협동군에는 소총병 사단 5-9개, 기병 사단 1-3개 및 전차 여단 1-3개 가량이 배속되어 있었다. 1942년 말 군단 수준 지휘부управление가 복원되었고 군은 소총병 군단 2-4개 (대부분 3개) 로 구성되기 시작하였다 (소총병 사단 8-14개). 1943년에는 군 포병이 구성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평사포, 박격포, 대전차, 방공-포병 연대. 1944년에는 평사포 여단, 독립 전차 연대 2-4개 및 자주 포병 연대 1-3개가 포함되었다3.
전선의 주 노력이 집중되는 방면에서 활동하는 군은 전차 (기계화) 군단 1-2개, 돌파 포병 사단 (때로는 군단) 1-2개, 평사포 및 대전차 포병 여단 1-3개, 전차 및 자주 포병 독립 연대 최대 9개, 방공-포병 사단 1-2개를 배속받을 수 있었다. 군은 병력 6-17만 명4, 전차 및 SAU 120-600대, 포 및 박격포 600-3000문을 보유하였다. 군의 전투 행위는 항공 사단 3-5개 가량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5.
전차군은 1942년에 출현하였으며 1944년이 되어서야 최적의 전투 구성과 조직-정원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군 구성에는 전차 및 기계화 군단 2개, 독립 전차, 자주 포병, 대전차 및 경포병 여단, 공병 여단, 박격포 연대, 방공-포병 사단 및 유지보수 부대가 포함되었다6.
1944년 소비에트 전차군은 병력 4.8만, 전차 450-620, SAU 98-147, 포 및 박격포 약 700, 수송차량 4-5천, 특수 자동차 500-700 및 경차량 200을 보유하였다7.
전선 공세 작전은 처음에 50-120km 종심에서 시작하였으며 이후 종심은 250-300km로 확대되었으며, 군 공세 작전은 50-90km에서 100-180km로 증가하였다. 전쟁 시기 동안 전선의 공세대帶 폭은 조건에 따라 80에서 600km로 매우 다양했지만 평균적으로 약 250-300km였다. 이들은 총 연장протяженность 14-44km (평균 20-30km) 구획에서 적 방위를 돌파하였으며 이는 공세대의 2-3%에서 28% 범위였다8.
군 공세 작전에서 제병협동군 공세대는 10-30km였으며 2.5-10km 연장의 구획에서 적 방위를 돌파하였다.
병력 및 수단의 평균 작전적 밀도는 사단 당 3-5km였고, 공세대 일 킬로미터 당 포 및 박격포 60-80문, 전차 10-15대였다. 돌파 구획에서는 사단당 0.4-1.5km, 구획 1km당 전차 75대 이상으로 훨씬 더 높았다.
돌파 구획에서 병력 및 수단의 전술적 밀도는 1km당 전차로는 50-100대 (보병 직접 지원용 5-30대 포함), 포병으로는 76mm 이상 구경 포 및 박격포와 로켓 포병 발사기로는 200-300대였다. 소비에트 항공대의 폭격 밀도는 1km2당 80-100톤에 달했다9.
소총병 군의 평균 공세 속도는 일 5-7km에서 15-25km였고, 기동군의 경우 일 30-50km 혹은 그 이상이었다. 전선 작전의 지속기간은 15-20일, 군 작전의 경우는 5-12일이었다10.
적 전술 방위 지대 (주 방위대와 10-15km 이격된 이차 방위대) 돌파를 실현한 후 전술적 돌파를 작전적으로 확대하고 작전적 예비에 접근하여 이와 싸우는 것이 작전적 공세의 주 단계였다.
이 경우에 사용된 작전 기동의 형태는 다양했고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있는 군 타격 시스템을 포함 (그림 1, 2) 하였는데, 거의 항상 종심으로부터 종심까지의 병력 및 수단 기동이 수반되었다.
군 타격은 주로 적 방위를 돌파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공세의 확대를 목적으로, 종심 혹은 전선의 소극적 구획으로부터 군을 투입하여 방위에 뚫린 간극을 차폐하려는 적의 시도를 파탄내고 또한 적 방위의 작전적 종심으로 기동 편제를 기민하게 투입하기 위해 종심에서 종심으로의 군의 섬멸적 기동이 수행되었다.
그림 1. 전선 공세 작전에서 적용되는 작전 기동의 형태
- a) 일련의 분쇄дробящий 타격 (서부 전선, 모스크바 역공);
- b) 2개의 절단рассекающий 타격 (칼리닌 전선, 르제프-시쵸브카 작전);
- c) 2개 전선 인접 익측에서의 강력한 절단 타격 ("말리 사투른" 작전, 서부 및 보로네즈 전선);
- d) 적 포위 목적으로 두 수렴 방면에 대한 2개의 상등적相等的 타격 (보브루이스크, 르보프-산도미르 작전);
- e) 강력한 정면фронтальный 타격을 통한 적 절단 (제2 벨로루시 전선, 모길료프 작전);
- f) 3개의 상등적 타격을 통한 적 방위 종심 절단 (제1 벨로루시 전선, 비슬라-오데르 작전).
그림 2. 군 공세 작전에서 작용되는 작전 기동의 형태
- a) 일련의 분쇄 타격;
- b) 2개 군 인접 익측에서의 2개 절단 타격;
- c) 2개 군 인접 익측에서의 2개 절단 타격과 동시에 적군 전술 집단의 포위;
- d) 단일 방면으로 3개 군의 강력한 절단 타격;
- e) 적 포위를 목표로 인접 군 타격 집단을 향한 절단 타격;
- f) 두개 군 인접 익측에서의 절단 타격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잘 준비된 적 진지 전선에 대한 전술적 돌파구 형성이었다. 이의 실현에 대한 주 역할은 작전 첫째 날 주 방위대를 돌파하고 둘째 날에는 그대로 점령하거나 실패시 단기간 준비 후 2차 방위대를 돌파하는 전선의 제1 제형эшелон이 담당하였다.
이러한 신속한 속도는 기동으로 적의 예비를 선수치기 위해 필요하였다. 선수의 목적은 예비가 접근하여 관통된 간극을 봉쇄하기 전에 아측 기동군을 작전적 공간으로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적 방위의 신속한 파열을 위해 모든 가용 병력 및 수단의 최대 80%가 돌파 구획에 집중되었다. 이는 적 대비 병력 3-5배, 포병 및 전차 5-8배, 항공대 3-5배의 우위를 보장하였다11.
돌파는 강력한 기습적 포병 및 항공 준비사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지속시간은 25-145분이었다. 동시에 적 교전 속도는 분당 800-5000발, 화력 밀도는 돌파 구획 100m당, 분당 8-49발이었다. 이를 위한 포병의 최적 밀도는 1km당 250-280문 가량이었다12.
포병 준비사격이 끝나면, 보병 직접 지원 (NPP*) 전차 및 SAU가 한두 줄로 늘어서고 보병이 그 뒤를 따르며 적을 공격하였다. 중重전차는 생존한 장갑물체와 대전차 포병, 중中전차는 "부활"한 특화점을 파괴하였고, SAU는 전차 화력을 강화하고 견고한 물체를 파괴하였으며 보병은 조밀한 사격으로 적 보병의 경량 대전차 수단을 제압하였다.
1차 진지 종심에서의 화력 지원은 일반적으로 이중 "화력 장벽огневой вал"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1차 진지의 세 번째 참호 직전과 종종 그 뒤에 연대 제2 제형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2차 진지 종심에서의 포병 지원은 기본적으로 단일 "화력 장벽" 혹은 순차 집중 사격 방법으로 실시되었다.
3차 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사단 제2 제형이 전투에 주로 투입되었다. 적의 기준비 방위를 돌파할 때 NPP 전차의 최적 밀도는 킬로미터 당 50-60대여야 했고, 이는 매우 희박하였기에 대부분의 경우 3차 진지에서 군 기동 집단 (PG) 의 선견 여단 혹은 집단 전체 (독립 전차군단 혹은 기계화군단) 가 전투에 투입되었다. 2차 방위대의 신속한 극복을 위해 소총병 군단의 제2 제형과 군의 PG 주력, 심지어는 군의 제2 제형인 소총병 군단까지도 전투에 투입되었다.
동시에 대부분의 작전에서 NPP 전차의 만성적 부족과 돌파 간 이들의 막대한 손실로 인해 빠른 속도로 적의 주 방위대를 돌파하고 2차 선조線條를 극복하기 위해 전선 PG인 전차군이 회전會戰, сражение에 조기 투입되어야 했다. 특정한 작전 (야시-키시뇨프, 벨로루시 및 동프러시아) 13 에서만 소위 "순수한 돌파"에 투입되었다.
전술적 돌파구의 작전적으로의 발전은 군, 전선 제2 제형의 전투 투입 및 전선 성과 확대 제형의 활동으로 수행되었다.
성과 확대 제형은 기동 집단 1-2개 (경우에 따라 3개) 로 구성되었다. 기동 집단은 일반적으로 강화된 전차군 혹은 다수의 독립 전차 (기계화) 군단으로, 때로는 기병-기계화 집단 KMG (기병 군단 1-2개, 전차 혹은 기계화 군단) 와 같은 작전적 임시 대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과 확대 제형은 적 방위 작전 종심에 기민하게 난입하여 전투군 대부대와 합류하기 전까지 작전적 예비를 괴멸시켰다. 때때로 내부 전선과 제1 및 제2 제형 대부대와 협동하여 외부 전선을 창조하여 적군 집단을 포위하고, 적을 추격하여 접근하고 후퇴하는 군이 종심에 준비한 방위 경계를 선점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기동 및 기병-기계화 집단은 제1 제형 주력 소총병 제대соединение와 이격되어 활동하였다 (최대 50km 이상).
이러한 행위의 특성을 보장하기 위해 군 및 전선 대부대의 작전 대형은 복잡하고 깊었다. 전쟁 과정에서 군 작전 대형의 진화를 그림 3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 공세 작전에서 제병협동군 작전 대형의 발전
이는 기준비 적 방위를 성공적으로 돌파하고 종심으로부터 종심까지 강력한 병력 및 수단의 기동을 통하여 발전할 수 있는 대부대의 복합적이고 깊은 작전 대형이었다.
많은 소비에트 군지휘자들 (특히 1943년 이후) 이 공세 작전에서 군 작전 집단 통제술術의 최고 사례를 끊임없이 증명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하는 특징적인 예시이다.
1944년 1월 27일 제2 우크라이나 전선 선조에서 코르순-셰브첸코프스키 공세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독일군을 포위하는 과정에서 극히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적은 북쪽에서 "비킹" 기갑사단과 보병사단 2개로, 또한 남쪽에서 기갑사단 3개로 반격하여 돌파구로 투입된 제5 근위 전차군 주력을 단할斷割하였고 관통된 작전 대형의 간극을 차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선 사령관 I.S. 코네프 대장은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전차군의 두 전차 군단은 통신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제1 우크라이나 전선 전차병 쪽을 향하여 공세를 지속하고 돌파구에 진입하지 못한 전차 및 기병 군단으로 돌파 구획 병목에 적에 의해 형성된 "폐색"을 파쇄하고 적 포위 행위를 완료할 것.
강력한 포병 화력과 군의 결정적인 행동으로 구상은 성공적으로 실현되었고, 전차군 통신이 복원되었으며, 2월 2일까지 전선 선조에서 적을 포위하는 내부 및 외부 전선이 거의 동시에 형성되었다14.
본 작전에서 스타브카 VGK도 그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2월 4-8일 적이 기갑사단 4개로 타격을 실시하여 바투틴 전선 제40군 방위 종심 25km까지 침투하였을 때 스타브카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결정에 따라 제2 전차군 (전차 370대) 이 예비에서 돌파 구획으로 즉시 이전되어 진창을 통해 수백킬로미터의 영웅적인 돌진 이후 전투에 돌입하여 포위 외부 전선 돌파 위협을 청산하였다.
작전적 방위는 전선 작전에서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었다. 처음에는 선형적 특성을 지니고, 병력 및 수단의 밀도가 낮고 종심이 얕았으며 작전 대형에 큰 파열부가 있었으며 종종 익측이 개방되어 있었다. 지형에 대한 공병 장비가 열악하고 대전차 안정성이 예외 수준으로 낮았으며 병력 및 수단의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방위는 쉽게 돌파당했고 부득이하게 기동 형태를 취해야만 했다. 때때로 기동 형태의 방어는 무질서한 후퇴로 전화轉化되었고 가끔은 공황적 퇴각으로 바뀌었다.
특히 지휘 구성과 군이 포위 조건에서 완고히 싸우다 성공적으로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인력과 기술품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광활한 영토를 상실한 것은 특히 우울한 점이었다.
이후, 병력 및 수단이 축적됨에 따라 작전적 방위는 진지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군은 연속적인 방위대를 지탱하고 종심에 병력을 제형화하여 적 공세에 대해 격화되는 저항을 보장하였으며 공병적 측면에서 지형을 철저히 장비하였다. 대전차 방위가 이의 기초가 되었으며 강력한 기동 요소 - 강대한 전차 및 기계화군, 기계적 견인 대전차 포병 부대 등의 편제가 대부대 구성에 존재하여 적의 돌파와 포위 및 우회 위협에 지체없이 대응할 수 있었다.
전선은 통상적으로 최대 6개의 방위 경계를 유지하였다 (그림 4). 방위대는 250-300, 때로는 350km였고 선조 종심은 120-150km에 달했다. 이들은 거의 항상 제2 제형과 강대한 기동 예비를 보유하고 있어 방위의 안정성이 높았다.
제병협동군은 선조를 따라 30-60km 전면과 30km 종심을 방어하였다 (그림 5). 이의 한계 내에서 주, 2차 및 군 방위대가 준비되었다. 작전 대형은 보통 강대한 전차 예비, 대전차 예비 및 이동 방벽 분견대, 포병 및 방공-포병 집단의 2개 제형을 포함하였다.
전차군은 일반적으로 신속하게 방위로 전환되었다:
- 공세 작전에서 - 반격 격퇴, 경계 확보, 포위 외부 전선 형성 등을 위해;
- 방위 작전에서 - 적의 돌파 방면으로, 반격 참여 후 군 집단 포위 및 우회 행위를 위해.
그림 4. 전쟁 3기 전형적인 전선 방위 대형
전차군 방위대 (그림 5) 는 전면 30-40km와 종심 15-20km였다. 적의 작전적 종심에서 원형 방위 시 이의 둘레는 20-22km였다. 방위는 1개 혹은 2개 제형에서 1-2개 선조로 구축되었으며, 1차 선조의 종심은 6-8km였다15.
그림 5. 전쟁 3기 전형적인 제병협동군 및 전차군 방위 대형
작전 기동의 주요 형태는 종심과 전선에서 공격받지 않은 구획에서 위기 지점까지 병력 및 자산의 동중심同中心 기동이었다. 병력 및 수단의 후퇴 및 작전적 역위易位, рокировка, 캐슬링 (대부대 익측에서 중앙으로 혹은 다른 익측으로) 와 같은 형태도 사용되었다.
대부대의 강인성과 끈기는 작전적 방위의 핵심이었다. 1942년 9월 말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하던 제62군은 폭탄과 포탄의 폭풍* 아래에서 세 부분으로 분할되어 볼가 강으로 압박받았지만 빈약한 보급 조건에서도 파시스트들이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허용치 아니하였다. 이토록 끔찍한 환경에서 군은 벽처럼 서있었을 뿐 아니라 항시적으로 순차적 화력 타격, 역습контратака을 가하였으며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반격контрудар까지 수행하였다16.
* 66일 간의 방위전 간 적은 폐쇄 포진지에서만 90만 발 이상의 포탄 및 박격포탄을 도시로 발사하였으며, 일일 1000-2500회 이상의 타격 항공대가 출격하였다. 전선 1km당 평균적으로 76000발의 포탄과 폭탄이 낙하하였다 (저자 주). ↩
기동성은 작전적 방위의 안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쿠르스크 호弧 남면에 대한 히틀러주의자гитлеровец, 나치들의 공세 첫날 적이 강력한 기갑 철권으로 제6근위군에 주공을 가하였고 이것이 유지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졌을 때 보로네즈 전선 사령관 N.F. 바투틴 대장은 기계획 반격 수행을 대담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기동 예비로 군 종심으로부터 2차 방위대까지 동중심 기동을 수행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제1 전차군, 제2 및 제5 근위 전차군단을 전개하여 군 제2 제형 (제51 및 제90 근위 소총병 사단) 및 후퇴하는 군과 함께 단호한 방위를 수행하였다.
결과로 강력한 병력 집중 (10km 전선에 5개 기갑사단) 과 정교한 전술을 사용하는 전선 3-5km에 기갑차량 200-300대의 타격 집단 공세에도 불구하고 적은 밀집된 대전차 방위에 돈좌되었다.
그들은 예비를 전투에 투입하여 지속적으로 노력을 강화했으며, 이에 전선 사령관은 제1 전차군을 소총병 사단 2개, 전차 군단 2개, 전차 여단 3개, 전차 연대 3개 및 포병 및 대전차 부대 20개 이상으로 강화하여 대응하였다.
노력 증강 경쟁에서 승리하여 추가 공세 지속의 가망이 없어졌을 때 히틀러주의자들은 노력을 프로호로프카 방면으로 선회하였다17.
1945년 발라톤 방위 작전 간 적 전차 제대의 돌파를 2회나 방지하고 제4 근위군의 방위 안정성을 보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병력 및 수단의 광역 기동이었다. 해당 작전에는 제병협동 제대 5개와 병과 부대 최대 20개가 참가하였다. 제62 근위 소총병 사단은 군 좌익에서 우익으로 150km 이상 이격된 거리로 역위를 수행했고 제93 소총병 사단은 먼저 우익 (약 20km 거리) 에서, 4일 후 작전 대형 중심 (50km 이상 거리) 에서 재편성되었다. 제20 근위 소총병 군단 군단포병은 우익에서 중앙으로 역행 기동을 실시하여야 했다18.
작전적 방위의 활동성은 항공 및 포병 대응준비사격 및 다수의 역습 및 반격 수행으로 보장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종종 매우 중요한 병력이 할당되었다. 군의 반격은 침투하고 돌파한 적군 집단의 격멸과 시간 벌충, 구상 파탄을 의도로 수행되었다.
전술의 발전.
최상위 제병협동 전술 제대는 소총병, 전차 및 기계화 군단이었고, 주력은 소총병 사단, 전차 및 기계화 여단이었다.
소총병 군단에는 일반적으로 소총병 사단 3개가, 매우 드물게 군단 자주-포병 연대 (SU-76) 가 더 배속되었었다. 군단은 이하로 강화될 수 있었다: 전차 여단, 독립 전차 및 자주-포병 연대, 포병 연대에서 돌파 포병 사단 (일반적으로 평사포 연대 없이), 로켓 포병 연대, 박격포 연대, 최대 3개 대전차 포병 연대 또는 여단 전체, 다양한 지원 및 보급 편제. 군단은 병력 1.6-2만, 포 및 박격포 400-600문, 전차 및 SAU 최대 100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소총병 군단의 공세 선조 폭은 3-10km, 당일 과제 종심은 12-15km에 달하며 적 2차 방위대 점령을 포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 선조를 돌파하여 2차 선조에 도달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상황 조건에 따라 공세 속도와 과제 이행 기간이 달라졌다. 적의 주 방위대 돌파는 주로 3-4일 이내, 때로는 그 이상에 이루어졌다19.
군단 방위대는 전면 12-15km에서 30km였고 종심 12-15km였다. 이 한계에서 군단은 2개 방위대를 준비하고 지탱하였다: 제1 제형 소총병 사단이 방어하는 종심 6-8km의 주 방위대 및 제2 제형 사단이 체재하는 종심 5-7km의 2차 방위대.
전차 군단은 독립이거나 전차군 산하일 수 있었다. 이들은 보통 전차 여단 3개 및 차량화소총병 여단 1개, 중전차 연대, 자주-포병 연대 2개, 박격포 연대, 방공-포병 연대, 로켓 포병 대대дивизион를 예하에 두고 있었으며 병력 0.8-1.2만, 전차 및 SAU 170-270대, 포 및 박격포 30-150문을 보유할 수 있었다.
기계화 군단은 독립 혹은 전차군 산하일 수 있었다. 이들은 기계화 여단 3개 및 전차 여단 1개, 경포병 연대 및 전차 군단과 동일한 전투 부대를 예하에 둘 수 있었다. 병력은 1.3-1.6만, 전차 및 SAU 200-250대 및 포 및 박격포 90-230문을 보유할 수 있었다20.
공세에서 이러한 군단은 선조 6-8km의 1.5-28km (대부분의 경우 4-8km) 종심에서 성공을 확대하기 위해 전투에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활동 선조는 8-10km로 팽창하었다. 공세 첫날 전투 임무의 종심은 15-20에서 50km, 이튿날엔 20에서 80km가 될 수 있었다. 제병협동군 소총병 제대 전투 서열로부터 독립 군단의 평균 이탈 정도는 30-40km 정도였으며 드물게는 100km에까지 도달하였다21.
방위에서 전차 군단은 전면 8-10km 및 종심 4-6km, 기계화 군단은 각각 10-15km 및 5-6km 선조를 지탱하였다22. 전투 서열은 일반적으로 강대한 전차 및 대전차 예비가 배분된 한 개 제형으로 구축되었다.
제병협동 제대의 주력은 소총병 사단이었다. 사단은 소총병 연대 3개 (각 2천 명 이상의 정원) 최초로는 (전쟁 전까지 정원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음) 2개, 이후에는 1개의 포병 연대로 구성되었다. 전쟁 말 사단 구성에는 포병 여단, 독립 방공-포병 대대, 대전차 대대, 자주-포병 대대 (SU-76) 가 되입되었다. 또한 사단에는 지원 및 보수 구분대가 배속되었다.
전쟁의 다양한 시기에 사단 정원은 병력 0.9-1.4만 (평균 1.2만), 포 및 박격포 약 200문, 대전차포 18-66문, 방공포 6-12문, SU-76 자주포 16대를 보유하였다. 또한 사단은 기관총 100-170정, 대전차 소총 100-200정, 전쟁 말기에는 차량 300-400대 및 군마 1200-2500필을 보유했었다23.
그러나, 대부분의 작전에서 실제 인력, 무장 및 군사 기술품 수량은 정원의 40-50% (3-6천 명) 를 거의 초과하지 아니하였다. 일부 작전의 개시 시에만 주공 집단의 일부 제대의 수가 약 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공방 모두에서 가장 큰 손실 비율이 보병에 있었고, 높은 격화 속도로 인하여 이를 보충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설명된다.
전쟁 첫 기간에 소총병 사단 공세대 폭은 5-10km, 방위는 2-3.5km, 후속 1.5-2.5km 구획에서 파열되었고 일반적으로 돌파 구획의 폭과 일치하였다24. 당면 과제의 종심은 3-5km, 차후는 5-12km였으며 일 과제는 10-15km였다25.
전투 서열은 단일 혹은 이중 제형으로 구성되었다. 1943년부터 연대 및 사단 포병, 사단 박격포 집단이 창설되기 시작하였고 선견대, 대전차 포병 예비 및 이동식 방벽 분견대가 필수 요소가 되었다.
사단 방위는 2-3개 진지로 구축되었으며, 이들의 종심은 각각 3-5 및 6-8km 였고 선조 폭은 8-14km 혹은 그 이상이 될 수 있었다. 방위의 기초는 연대 방위 구획에 창설된 전차위협 방면을 요격하는 대전차 지역이었다. 지역 자체는 지뢰원으로 엄호되는 대전차 교차점узел과 대전차 포병이 집중된 거점으로 구성되었다. 전방변邊, край 앞에서 종심 2km까지 1km당 최대 2000개의 지뢰 매설 밀도를 가진 방벽대가 형성되었다.
방위의 전술적 병력 및 수단 밀도는 전면 1km당 소총병 대대까지, 포 및 박격포 40문, 전차 및 SAU 4-5대로 상당했다.
진지 형태에 대한 명백한 지향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방위는 또한 높은 활동성과 기동성으로도 구별되었다. 군은 약간의 가망성이라도 있다면 진격하는 적에게 강력한 화력 타격을 가했고, 돈좌된 부대의 격멸을 목표로 제2 제형 및 다양한 예비가 다수의 반격을 감행하였다.
부대 및 구분대의 주요 전술 시스템은 공세에서 화력 장벽을 따르는 기갑차량과 소총병 사슬 전투선의 조합이었다. 방위에서는 여러 개의, 일반적으로 3개의 참호 진지로 장비된 대전차 거점 (교차점) 을 순차적으로 지탱하는 것으로 성립했다.
결론적으로 긴장된 전쟁은 군인에게서 귀중한 구성요소를 맥석과 혼합물에서 빠르게 분리하는 "용광로"임을 유의하여야 한다. 유능한 지휘관은 빠른 속도로 "성숙"하고, 평범하면 필연적으로 죽거나 없어진다.
이 과정과 병행하여 전쟁 동안 군이 현대적 무장 및 군사 기술품으로 포화되었고 군사 편제의 조직-정원 구조가 발전함에 따라 붉은 군대 군지도자들의 군사술 수준도 빠르게 성장하였다.
불행히도, 그 당시의 낮은 사회 환경 개발 수준으로 인하여 이러한 과정은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웠으며 전쟁의 처음 두 기간 동안 매우 높고, 때때로 변명할 수 없는 손실이 수반되었다. 적의 질적 상태가 "NO"로 붕괴하였을 때 소비에트 군지도자들의 군사술의 우세가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입증되었다. 이전에 적이었던 살아남은 독일 장군들이 전후 이에 대해 가장 잘 말했다.
1941년 동부 전선에서 제2 기갑군을 지휘하였던 잘 알려진 베어마흐트 G.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이하와 같이 언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비에트 최고 사령부가 전략 분야에서 높은 역량을 소유하였음이 분명해졌다... 러시아의 장군들과 군인들은 복종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1941년의 어려웠던 상황에서도 초심을 잃지 않았다. 모든 전쟁의 역사는 이들의 인내를 말해준다. 군인들에게 그러한 강건함과 인내를 배양할 필요가 있다26".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작으로 소비에트 최고 사령부가 종종 우리의 모든 기망을 능가한 것은 완전하게 사실이다. 군의 신속한 기동과 이전, 주공 방면의 선회, 공세로의 후속 전환을 위해 교두보를 형성하고 초기 위치를 장비하는 기량을 선보였다. 전투에서 소비에트 군인들의 자기희생에는 한계가 없었다".
사단장, 군단장, 군 사령관, 집단군 사령관으로 동부 전선에서 싸운 G. 프리스너 상급대장이 말했다27.
동부 전선에서 전차 군단 및 전차군 참모장으로 싸웠던 F. 멜렌틴 장군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들 (러시아 최고 사령부 및 총참모부 - 저자 주) 은 상황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활력있고 결정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의심의 여지 없이, 주코프, 코네프, 바투틴, 바실레프스키 등이 있는 러시아는 군과 전선의 재능있는 사령관들을 가졌다"28.
그러므로 제2차 세계대전기 소비에트 군사술의 업적에서 우리의 승리를 폄하하는 비평가들의 사설辭說은 완전히 근거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Ларионов В.В., Антонов Н.А., Выродов И.Я. и др. Эволюция военного искусства: этапы, тенденции, принципы. М.: Воениздат, 1987. С. 168.↩
Кривошеев Г.Ф., Андроников В.М., Буриков П.Д. и др. 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М.: Воениздат, 1993. С. 159-220; Сеоев В.Б., Андреев В.П., Бегунов С.Ф. и др. Фронты наступали. М.: Наука, 1987. С. 31-32.↩
Слепенков Д.К., Червонобаб В.П., Гарбуз Г.И. и др. Армейские операции. М.: Воениздат, 1977. С. 7?8.↩
Кривошеев Г.Ф., Андроников В.М., Буриков П.Д. и др. 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С. 187, 189, 199.↩
Панов Б.В., Киселев В.Н., Португальский Р.М. и др. Армейские операции. М.: ВАФ, 1989. С. 10.↩
Радзиевский А.И. Танковый удар. М.: Воениздат, 1977. С. 25.↩
Исаев А. Антисуворов. М.: Яуза-Эксмо, 2004. С. 174.↩
Радзиевский А.И. Развитие теории и практики прорыва, часть 2. М.: ВАФ, 1977. С. 215.↩
Сеоев В.Б., Андреев В.П., Бегунов С.Ф. и др. Фронты наступали. М.: Наука, 1987. С. 165, 169, 173; Слепенков Д.К., Червонобаб В.П., Гарбуз Г.И. и др. Армейские операции. С. 52. Прил. 2.↩
Слепенков Д.К., Червонобаб В.П., Гарбуз Г.И. и др. Армейские операции. С. 33; Панов Б.В., Киселев В.Н., Португальский Р.М. и др. Армейские операции. М.: ВАФ, 1989. Прил. 2.↩
Сеоев В.Б., Андреев В.П., Бегунов С.Ф. и др. Фронты наступали. С. 53.↩
Португальский Р.М., Сапожинский В.А., Борщов А.Д. и др. Огневое поражение противника (по опыту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 М.: ВАФ, 1992. С. 208, 283.↩
Военная Мысль. 1981. № 6. С. 69-72.↩
РадзиевскийА.И. Развитие теории и практики прорыва, часть 2. М.: ВАФ, 1977. С. 86, 87.↩
Крупченко И.Е., Сергеев Л.В., Киреев Н.А. и др. Строительство и боевое применение советских танковых войск в годы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 М.: Воениздат, 1979. С. 225.↩
История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М.: Воениздат, 1975. Т. 5. С. 177-187.↩
Зинин Я.Г., Марышев А.П. Опыт оборонительных действий танковых армий в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е. Военная Мысль. 1976. № 12. С. 71-73.↩
Слепенков Д.К., Червонобаб В.П., Гарбуз Г.И. и др. Армейские операции. С. 188-192.↩
Прорыв подготовленной обороны стрелковыми соединениями: сборник статей. М.: Воениздат, 1957. С. 81-245.↩
Лютов И.С., Матий Е.З., Прохоров В.С. и др. Тактика в боевых примерах (дивизия). М.: Воениздат, 1976.↩
Крупченко И.Е., Сергеев Л.В., Киреев Н.А. и др. Строительство и боевое применение советских танковых войск в годы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 С. 122, 125, 127.↩
Там же↩
Лютов И.С., Матий Е.З., Прохоров В.С. и др. Тактика в боевых примерах (дивизия). Схема 1.↩
Ларионов В.В., Антонов Н.А., Выродов И.Я. и др. Эволюция военного искусства: этапы, тенденции, принципы. С. 175.↩
Лютов И.С., Матий Е.З., Прохоров В.С. и др. Тактика в боевых примерах (дивизия). С. 25.↩
Гудериан Г. Опыт войны с Россией. Итоги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сборник статей. М.: Издательство иностранной литературы, 1957. С. 133.↩
Фриснер Г. Проигранные сражения. - М.: Воениздат, 1966, с. 222-223.↩
Меллентин Ф. Бронированный кулак Вермахта. Смоленск: Русич, 1999. С.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