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репость Кузнецов

평화-2 강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장래적 전망

비즈니스 및 정치 저널 《오드카노》Деловой и политический журнал «Однако» 2014년 12월-2015년 1월호

미하일 바라바노프


거의 사반세기 동안 러시아는 서방의 뒤를 이어 무조건적이고 불평없이 서방의 발자국을 따라서 서방 세계의 일부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2014년 그토록 원했고 이미 그렇게 된 것 처럼 보였던 이 문명의 중요한 조각은 클린치에 들어갔다.


source: http://u-96.livejournal.com

I.

상황은 점점 더 열차 사고와 비슷해지고 있다. 일어나는 일은 충격적이고 여전히 불가해하며, 세상의 평범한 그림을 바꾸지만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이 다음은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우크라이나 위기의 불가피성과 예단성은 점점 더 확실시된다 - 유일하게 놀라운 것은 우크라이나의 국가 형성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고, 키예프와 모스크바 사이의 관계가 더 빨리 파탄나지 않았는가 이다. 또한 러시아가 그렇게 오래도록 친서방 노선을 따랐음에도 서방 (주로 미국) 은 러시아가 이러한 노선을 변경할 잠재력을 성장시키고 있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이 일견 이상해 보인다. 지금부터 몇 년 후, 미국은 자신을 목표하는 대륙간 핵 탄도 로켓을 매년 30발을 휘두르는 나라에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큰 넌센스 중 하나로 간주될 것이다.

USSR 붕괴 이후 서방은 모스크바를 수도로 하는 이전의 적이 영구히 패배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서방 안보 구조에 러시아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새로운 "동반자"들은 냉전 시대의 구적舊敵에 대해 약간의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에 소비에트 제국의 주요 잔재인 러시아를 NATO 영토로 포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악명높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동진이 시작되었다.

현재 러시아의 국익과 관련된 최소한의 요건과 권리를 만족하는, 러시아를 공통된 안보 구조로 통합하는 서방의 어떠한 제안도 부재함이 명백하였고 이는 모스크바를 치명적 역할로 세우고 독립된 항해를 하도록 보내었다. 그러나 서방이 실제로 러시아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공통 안보 구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그토록 친서방적으로 간주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통치 첫 해는 가장 방종적인 않은 모스크바 제국주의에 따른 행동으로 특징지어진다.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남오세티야 및 압하지야의 분쟁에 개입하였으며 이러한 개입은 신생 그루지야 및 몰도바의 영토 통일성을 훼손하고 모스크바의 비호 아래에 있는 미승인국의 사슬을 만들었다. 러시아의 중재로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의 군사적 성공을 사실상 인정하여야 했고 상당한 크기의 "순수"한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장악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존재를 구성할 수 밖에 없었다. 타지키스탄 내전에서 러시아의 관할 하에 있던 제201사단의 개입은 이슬람주의자들의 패배를 이끌었다. 오랜 논쟁 끝에 크림에서의 흑해함대와 러시아 기지의 존재를 우크라이나에 강요하였다. 러시아군 주둔 체계는 발트연안을 제외한 모든 구 소비에트 공화국을 포괄하였다. 옐친의 "근방" (러시아의 노골적 영향력 영역) 개념은 공식 수준에서 공인되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연방의 영토적 통일성을 위한 투쟁 명목으로 피비린내 나는 1차 체첸 전쟁이 뒤따랐다.

서방은 실제로 이 모든 것을 외면하였으나 크렘린 궁에 앉아 있는 옐친은 친서방 노선의 보증인이였으며 공산주의자나 러시아 초제국주의자의 가상의 복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타협의 기반이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옐친 러시아에 대한 서방 태도의 핵심에는 러시아 곰은 죽어가고 있고 영원히 부활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과 같은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교정책에서의 옐친의 모든 진보와 주장은 "내수" 독점적 수사학으로 간주되었다.

동시에 러시아를 실제 안보 구조에 통합하기 위한 건설적 제안은 부재했다. 1997년 NATO 동진의 제1파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는 서방 정책의 명확성을 확인시켰다: 옐친 러시아의 반발은 의례적이었고 서방의 진격은 심대한 반대를 겪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1999년 집권 후 서방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조정하려 시도하였으며, 안보와 영향력 분야를 포함하여 러시아의 순수한 국익을 부분적으로만 인정받는 대가로 러시아를 서방 공동체에 대규모로 통합할 것을 제안하였다. 2001년 9월 11일 러시아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동맹이 되는 사건이 시의적절하게 발생하였다. 푸틴 집권 첫 해는 명료한 친서방 정책으로 특징된다: 쿠바와 베트남의 러시아 군사 시설이 축소되었고, 푸틴은 모든 국제 (실제로는 서구 주도의) 기관 및 조직에 국가를 통합하기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였으며 푸틴의 엘리트들은 글로벌 러시안Global Russians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내외적 지위가 안정화되고 "KGB의 주구"인 푸틴의 측근들과 맞물린 러시아의 대내외적 지위 안정화는, 서방이 너무 맹목적이고 의심스럼게 충성하는 파트너로서의 모스크바에 대한 불만 표출을 초래하였다. 미국의 일방적 행동의 강화 (유고슬라비아 및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신봉함) 와 NATO의 지속적인 확장은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서방의 정책이 점점 더 가혹하고 속박적인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기여하였다. 모스크바는 본질적으로 어떠한 대가도 제공하지 않고 깃발을 꽂혔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을 이끈 첫 우크라이나 마이단에서 서방 국가들은 後소비에트 영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가능한 한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관계의 성질에 대한 푸틴의 불만이 2007년 뮌헨에서의 연설에서 처음 드러났으나 서방에서는 무시해도 될 "구식" 수사학으로 받아들여졌다.

20년 간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관점은 러시아는 더 이상 갈 길이 없고 러시아가 서방의 이익에 반하는 심각한 행위를 "감히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서방 간의 관계에서 위기의 첫 신호탄은 2008년 8월 남오세티야 사태에서 러시아가 간만에 감히 반격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이는 일종의 불행한 사고로만 인지되었는데, 이것은 그루지야가 "선공"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안보 분야에서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다 - 기차는 서로 마주보며 질주하고 있었고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러한 발걸음의 중요한 이정표는 2012년 5월 블라디미르 푸틴이 크렘린으로 귀환한 것이었다: 서방에서는 그들에게 불편한 러시아 정치 지도자의 집권이 평생 연장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다시금 대통령직에 오른 사실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였다.

그 해법은 "마그니츠키 사건"이었고, 이는 실제로 푸틴과 그 측근들에 대한 제재 1파를 촉발하였다. 러시아에서는 부패 확산 뿐 아니라 권리와 자유의 침해에 관한 캠페인이 탄력받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정말로 할 말이 있었기 때문). 2013년 말 까지 서방 언론은 푸틴과 러시아로부터 "추방자"를 공개적으로 소상하기 시작하였고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아이디어를 홍보하였다. 푸틴이 소치 메가프로젝트에 자신과 국가의 명성을 걸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다가올 올림픽에 대한 서방의 태도는, 일부 서방 지도자들의 무지와 더불어 모스크바에 대한 노골적인 객담喀痰이었다.

이러한 고무적 배경 하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새로운 마이단이 탄생하였다.


II.

물론, 2013-2014년 마이단은 실제로 야누코비치가 그리 하였음에도 "부패한 야누코비치 정권의 범국가적 타도"와는 관련이 없다. 양 우크라이나 마이단 (2004년 최초의 마이단 및 10년 후 두 번째 마이단) 의 메카니즘은 거의 모든 선거에서 서부보다 더 많은 동부 사람들이 투표한 우크라이나 동부의 지배적 대표자들을 강제로 전복시키려는 서부 및 중부의 국가적 열망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우크라이나인" 대표자들은 혁명적 경로로 우크라이나의 권력 균형을 바꾸려 시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의 마이단은 적극적인 소수파의 권력 찬탈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 소수파들의 의지를 나라의 나머지에 관철하려는 근본적으로 노골적인 반민주 운동 (정치학적으로 태국의 "황색" 운동과 유사) 이었다. 당연하게도, 권력 장악 후 "서부-키예프" 소수파는 새로운 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동부"의 영향력 제한과 강제적인 우크라이나화 조치를 취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한 번도 그에 투표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타도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최근 마이단은 결단코 야누코비치에 대한 실망의 결과가 아니다. 티 파티와 애리조나 "민병대"가 워싱턴에 집결하여 오바마 대통령을 축출하고 이러한 폭력 행위를 전미 인민의 뜻으로 내세우는 것과 같다. 야누코비치에게 투표한 동부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반응도 놀랍지 않다. 선견先見적 관찰자들은 2004년 첫 번째 마이단 이후 이미 미래의 우크라이나 내전의 가능성을 점친 바 있다.

어떤 식으로든, 2014년 마이단의 승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서방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는 친서방 및 노골적 반러시아 세력의 또 다른 승리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야누코비치 정권 전복의 결과로 집권한 "민족 지향적 세력"의 주요 임무는 장기간에 걸쳐 본 승리를 공고화하여 "동부"가 다시금 권력을 되찾을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정화淨化 법안, 러시아어 사용 폐지 법안이 있다.

그 자체로 우크라이나에서의 반러 혁명은 러시아의 이익과 신망의 관점에서 절대 용납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집권 엘리트들은 "뛰지 않는 놈은 모스크바 놈이다кто не скачет, тот москаль"와 같은 공격에 불가피하게 대응하여야 했다. 상응하게, 모스크바의 불가피하고 명백한 임무는 우크라이나에 반러 혁명은 한계에 봉착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평과는 푸틴이 아닌 키예프에서의 반모스크바 혁명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관점에서, 태고적의 러시아 영토였던 크림에서 러시아의 혹독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크림 작전을 결정한 크렘린이 이러한 행동이 수반할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결과를 알고 있었을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크림 병합의 주 문제는 나머지 우크라이나의 상태를 보존한 채로 크림의 병합은 적절치 못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의 지정학적 지위가 악화되어 우크라이나를 적대국으로 만든 것이다. 이 위협을 제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행로를 급격하게 변화시키거나, 또는 어떤 식으로든 -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의 러시아어 사용 지역을 소위 노보라씨야로 구성하여 러시아 연방으로 분할하고 합병해 급격히 약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러시아어 화자 인구들이 크림의 러시아 합병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런 환경에서 우크라이나에서의 "2차전"은 필연이었다.

크렘린은 이를 이해하였는가? 슬라뱐스크에서 이고르 스트렐코프 집단의 행동과 우크라이나 남동부 친러시아 시위의 총체적 조정은 러시아 최고 당국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4년 4월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에서 정확히 무엇을 원했으며 어디까지 가려고 했는가? 이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이에 대한 답은 우크라이나 비극에서 많은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외무부의 유명한 3월 성명에 요약된 모스크바의 키예프에 대한 공식적 요구는 우크라이나의 연방화와 친러시아 지역의 권리 보장으로 요약된다. 이론적으로 이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적의를 중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러한 우크라이나 내부 질서 (발생하였다 치고) 가 지켜질 것임을 누가 모스크바에 보장할 것인가? 이러한 보장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러시아의 이익 면에서 우크라이나의 해체 및 노보라씨야 분리 시나리오가 더 합목적적이었다.

허나 그러한 분쇄는 크림에서와 유사하게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을 돕는 러시아 측의 압력 및 군사적 엄호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 가리발디-스트렐코프와 대부분의 노보라씨야 반군이 기대한 것은 바로 이런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러시아의 신속한 크림 병합에, 또한 반러시아 "완충 지대국"으로써의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붕괴에 대한 전망에 대해 충격받은 서방과의 심각한 대결로 이어졌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모스크바는 분명하게, 우크라이나에서 결정적 행동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주로 "지역" 및 "잠입" 반군 세력의 도움을 받아 우크라이나 남동부에서의 군사 행위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중대한 오산으로 판명되었다 -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 해당 지역에서의 친러시아 활동 규모를 과대평가했으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힘 및 "독립"과 그 안에서의 지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우크라이나 엘리트들의 관심을 과소평가했다. 우크라이나 봉기에 러시아가 무력 사용을 거부한 결과 키예프의 손이 해방되었고 동부에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발생하고 러시아는 이 비극적 사태에 연루되어 나날이 그늘질 모멘텀을 얻었다.


III.

2014년 4월 24일 러시아 안전보장평의회가 노보라씨야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사하는 것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은 모스크바에게 극히 불리하게 우크라이나 위기가 전개됨을 예정하였다. 4-5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 침공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비약적 붕괴 이어 위축된 우크라이나군의 패배를 유발할 것임이 절대적으로 명백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 화자 지역을 분리하고 나머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이익을 심대히 위협할 수 없는 이류 국가로 만들어 "우크라이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서방의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착수한 모스크바의 책략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예상한 대로, 제재는 지속되었다. 러시아는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 행동"을 포기한 순간부터 위기에 봉착했다: 러시아는 어떠한 배당도 없이 모든 "공격"에 대한 대가 (돈바스 반군 지원을 위한 상당한 자원 소모에서 서방 제재까지) 를 지난 6개월 간 지불하였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러시아 대외 정책의 상징적이고 어느정도는 논리적인 극치는 말레이시아 보잉-777 MH17편의 격추였다 - 이는 모스크바의 능력과 책임을 벗어난 사건이었으나 그럼에도 모스크바는 여전히 막대한 정치적 손실 (실제로는 제재의 강화로 물적인 것도 포함) 을 입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2-4월 간 확고히 유지하였던 이 복잡한 지정학적 게임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주도권의 상실은 패배에 대한 위협을 만들었다. 러시아는 화려하게 순간을 잡아내어 크림을 무혈 병합하였으나 우크라이나에서는 그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힘을 과소평가한 것처럼,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합동과 적대감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크렘린의 책략과 양보로 인해 서방 정부들은 크렘린에 영향을 끼치는 수단으로써 제재의 효과를 확신하게 되었다. 6월 1일 크렘린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 연방평의회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장군 사용의 이전 허가를 철회한 것과 같은 대규모 양보는 우연이 아니었고, 이는 오히려 키예프와 이의 서방 관리자들의 공격성을 급격히 증가시키는 반대 효과를 가져왔다.

돈바스 자체로도 러시아의 무기력과 순응의 표출은 군사적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고, 러시아는 분쟁에 더욱 깊이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이 필연이 되었고, 서방의 히스테리와 적대감이 새로이 발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말 일로바이스크 근방에서 우크라이나 군의 패배와 마리우폴에 대한 위협은 러시아가 키예프에게 반군을 패퇴시키는 것은 허용하지 않음을 표현하였다. 이는 돈바스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승리에 대한 희망을 박탈하였기에 총체적 상황의 급진적인 변화였다: 이른바 대테러 작전 (ATO) 은 무의미한 캠페인이 되었고, 키예프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사실 제한적이지만 우크라이나의 평화에 대한 첫 번째 강요가 있었다. ATO가 막 공언되었을 때 이러한 강요가 (많은 이들이 바랬음에도) 수행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이는 많은 생명을 구했을 것이고, 아마 보잉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강요"의 결과에도 8월 우크라이나 문제는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명백한 증거로 휴전 선언 기간 동안 돈바스에서의 군사 행위가 지속되었다. 9월 서명된 악명높은 민스크 의정서가 교전 양측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민스크 의정서가 무력한 기본적인 이유는 키예프가 어떠한 형태로든 반군을 협상 과정의 주체로서 인정함을 거부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입장은 존재하지 않는 당사자와 당연히 협상할 수 없는 까닭에 모든 협상 메커니즘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현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원리적으로 사각지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방도는 - 무력이다.

그러므로, 어떤 기이한 사건이 없다면, 우크라이나 평화의 새로운 강요는 거대규모의 무력적 활동의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2014년의 주요 경향이 크림의 합병과 우크라이나 내전이었던 것처럼, 정확히 이러한 군사-정치적 전망이 2015년 러시아에 열려있다.


IV.

러시아의 중대한 문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식화된 입장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살얼음판을 걷듯 점점 더 커져가는 서방과의 대립에서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 사건에 비관여한다는 공식적인 테제에 기대어 가능한 한 자신들의 계획과 의도를 숨기고자 한다. 의사意思의 위장 외에도 이러한 신중함은 잠재적인 적들이 러시아의 비교적 가능한 행위와 반응에 대해 항시적 불확실 상태로 잡아둘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동전의 이면은 서방 다수가 러시아를 움직이게 하는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정책의 궁극적 목표를 알아채지 못하며, 이러한 정책의 결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방은 러시아의 무제한적 확장과 "그 다음 목표가 될 수 있는"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 열광적인 선전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크라이나 위기를 마주한 모스크바의 목표와 임무의 공식화 회피는 우리나라의 전략적 문제로 귀결된다.

이로 인하여, 크렘린이 곧 키예프에게 불이행의 경우 현 우크라이나 정부가 돈바스에서 영구적인 전쟁을 계속하고 러시아의 국익을 해하려는 것으로 고려될 것이며 따라서 키예프 당국에 평화를 강요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원칙적 요구를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원리적으로 러시아 당국은 이미 이 방면으로의 "쓰로-인"을 시작하였다: 우크라이나의 NATO 비가맹 보장의 필요에 대한 러시아 대통령 공보실장 드미트리 페스코프의 최근 성명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크라이나 측에 대한 러시아 정책의 단기적 목표와 이에 상응하는 우크라이나 측에 대한 공식적 요구사항은 이하로 요약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이에 대한 보상으로 러시아는 DNR 과 LNR 이 우크라이나의 일부임을 인정 (국가의 연방화를 위한 효과적인 조치의 경우) 하며 우크라이나의 영토적 통일성 (크림 제외) 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키예프는 돈바스 재건에 대해 다양한 경제적 특혜와 할인 및 러시아의 협력을 제공받을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일련의 요구사항들은 後마이단 키예프 당국의 격노와 맞닥뜨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모스크바의 이러한 요구사항에 대응하기 위해 키예프를 지원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러시아는 광기의 연속인 돈바스 전쟁을 무력으로 종식시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이 경우 군사적 행위의 목표와 임무를 현저히 제한할, 모든 상기한 조건들을 우크라이나 당국이 수락토록 강제함을 목표로 키예프에 평화를 강요할 수 있다. 상기의 이론적 요구들은 우크라이나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지 않으며 키예프는 현상 유지를 인정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따라서, 온건성과 목표에 대한 뚜렷한 워딩은 제3국과의 불가피한 정치적 문제, 즉 러시아의 군사적 행동이 수반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들을 완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돈바스와 동부 우크라이나의 현재 사태는 러시아에게 있어 군사-정치적 및 인도주의적 상황 뿐 아니라 국가-전략적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다. 돈바스의 인도주의적 상황의 급격한 악화는 "러시아적 세계русский мир" 개념을 불신케 하며 돈바스 거주민들 사이의 친러시아 정서에 기여하지 않아 (스탈린그라드로의 전환이 아닌 상대적으로 부유한 러시아에 대한 합병을 지지하였던) 비슷한 운명을 원치 않는 다른 러시아어 사용 인구 지역의 사기를 저하시킨다. 돈바스의 파멸과 주민들의 고통은 모든 後소비에트 공간에서의 러시아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킨다. 따라서 가능한 한 빠르게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거주민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보장하는 것이 러시아 문제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역설적으로 이는 평화적 조정 상황의 주 장애물인 우크라이나 당국과 무장력에 대한 결정적 타격이라는 오직 군사적 방법으로만 달성 가능하다.


V.

따라서, 키예프 당국에 평화를 강요하고 모스크바의 조건에 따라 실제로 장기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러시아 연방 무장군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는 노보라씨야 무장군 (VSN) 의 결정적 공세는 매우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우크라이나 무장군이 선제적으로 VSN과 대규모 분쟁을 일으킨다면 이는 좋은 가능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히스테리적 호전성의 고조로 판단할 때, 이러한 대본대로 사건이 전개될 확률은 매우 높다.

우크라이나 동부에 대항 세력을 배치하는 작전적-전략적 형상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측에 극히 유리함에 주목하여야 한다. 우크라이나 VS (VSU) 의 실질적인 모든 전투력 보유 집단은 등 뒤쪽이 활짝 열린 채로 루간스크와 도네츠크 (또한 마리우폴) 주위에 밀집되어 있으며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의 나머지 부분과 가장 큰 행정 중심지 (키예프 및 하르코프) 를 보호할 병력이 거의 없다. 일례로, 하르코프 방위는 8월 말 스타로볘셰보에서 궤멸적 손실을 입은 제92 독립 기계화 여단 병력이 수행하였다. 키예프를 방호하는 주 병력은 제169 《데스나》 훈련소 편제로 구성되어 있다 - 즉, 이는 미훈련 부대이다.

우크라이나 영토 종심에의 효과적인 예비도 부재하다: 장비, 무장, 훈련이 부족한 동원된 병사로 구성된 수십의 국토방위 대대만이 예비를 대표한다.

"돈바스 전선"에 체재하는 VSU 부대들은 여름 전투 간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중장비의 상당수를 상실했다. 생존한 장비의 기술적 상태는 마멸과 경이로운 노후화로 인해 대부분 나쁘다. 우크라이나는 조야하고 구식인 전투 차량을 급히 채비시키고 수리함을 강요당한다. 자동차 또한 불만족스럽다.

우크라이나 VVS 는 ATO 간에 현저한 손실을 입었고 이미 많지 않은 항공기와 헬리콥터들을 많이 잃어 실질적으로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신속하게 VSU 의 병력을 증강하고 전투력을 회복하려 하지만 몇달 안에 상황을 최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동시에 해외로부터의 군사 원조를 시작으로 하여 우크라이나 동원령의 새로운 제파는 VSU 가 돈바스와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에의 군 밀도를 증강하고 작전적 예비의 축적을 개시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은 키예프에 평화를 강요하기 위한 작전 과정을 다소 혼란하게 하지만, 과정과 결과를 원칙적으로 변경하지는 못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우크라이나 좌안의 VSU 주력에 대한 전략적 포위를 실시할 수 있으며, 이는 그들의 신속한 패퇴로 이어질 것이다. 만일 DNR 과 LNR 의 병력 또한 최근 증가하고 재편되고 있다면, 이들의 행동은 러시아군 집단이 우크라이나 영토 깊숙하게 걸쳐 행동할 수 있도록 주로 돈바스 전선에 우크라이나 VS 를 잡아놓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이러한 타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리우폴로의 신속한 출현과 동시에 모든 VSU 돈바스 집단의 후방인 북쪽으로 확장할 수 있는 로스토프-나-도누 지역의 러시아군 집단으로부터 가해질 수 있다. 이 "남부 갈고리"는 루간스크 북부 지역의 타격으로 뒷받침될 수 있다. 이들의 우크라이나 집단 후방 지역으로의 신속한 진격은 그 자체로 그들을 뒤흔들 것이다.

동시에 러시아군의 "북부 집단"은 우크라이나 수도에 진입하지 않고 효과적인 저항에 대한 적의 의지를 완전히 마비시키고 키예프 방호를 위해 서둘러서 예비를 집결시키도록 강요하기 위해 수미 및 체르니고프 주를 통하여 키예프를 직접 타격할 수 있다. VSU 돈바스 집단을 이어서 포위하는 "북부 갈고리"를 형성하기 위하여 하르코프를 점령하고 이쥼 지역으로 진격하는 조공助攻이 가해질 수 있다.

사건의 이러한 전개는 루간스크와 도네츠크 주위에 집중되어 있는, 실질적으로 우크라이나 VS 집단의 모든 전투력은 최대 48-72시간 내에 완전한 포위 및 절대적 재앙의 전망에 직면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의 전격을 물리칠 것이 전혀 없다. 러시아군이 VSU 후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전망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군은 드네프르를 넘어 급하게 후퇴하기 시작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도망자로 변모할 것이다. 이 후퇴는 VSU 주력의 실질적인 격멸로 이끌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무장군의 대다수는 도네츠크 및 루간스크로부터 서쪽에 이르는 전략적 포위망에 갇히고 이곳은 대규모 포로 수용소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ATO 의 모든 세력은 단시간 내에 격멸될 수 있으며, 이는 곧 돈바스의 신속한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다.

작전 간 군 진격의 궁극적 목표는 군사 및 정치적 상황 및 제시된 평화 조건에 신속하게 동의하려는 키예프의 준비도에 의존하여 다양한 경계선으로 예정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임무는 루간스크 및 도네츠크 주 영토 전체의 (VSN과 함께) 점령, 드네프르로 진출, 하르코프 및 하르코프 주 점령, 남방으로는 크림 지협, 북방으로는 키예프 접근로로의 진출이 될 수 있다. 최대한의 임무는 가정되는 노보라씨야 8개 주 전체를 완전히 점령 (남방으로는 트란스니스트리아까지 진격) 하고 키예프를 봉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키예프에 평화 조건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균형은, 개혁된 러시아군이 질적으로 VSU 보다 훨씬 우수함으로 (더 새롭고 현대적인 무장을 포함하여) 러시아 측이 특별한 분규 없이 유사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활동하여야 하는 러시아 VS 집단의 규모는 4월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되었던 집단과 거의 일치한다. 서방의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독립 여단 8개 - 3개 차량화소총병 여단, 3개 상륙-강습 여단, 1개 해군보병 여단, 1개 포병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원된 제2 근위 타만스카야 차량화소총병 사단 및 제4 근위 칸테미로프스카야 전차 사단 주력으로 구성된 4개 연대 (3개 전차연대, 1개 차량화소총병 연대); 다양한 독립 여단에서 구성된 27개 대대 전술 집단 (14개 공중-상륙 집단, 12개 차량화소총병 집단 및 1개 해군보병 집단); 스페츠나츠 여단에서 구성된 13개 특수목적 분견대; 10개 독립 포병 대대. 아마도 공수군은 훨씬 더 많은 수 (거의 전부) 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예비로서 여러 차량화소총병 여단이 추가 증강될 것이다. 여기에 약 3만 명으로 추산되는 VSN 병력이 추가되어야 한다.

러시아 공군 및 육군항공대의 상당한 집단은 적절하게 사용될 경우 우크라이나 VS 에 대한 러시아 집단의 철저한 우위를 보장하여 "우크라이나 작전"의 가치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


VI.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분쟁의 러시아 무장군의 광범위한 개입에 대한 제약 요인은 서방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재 유럽과 미국 간의 관계의 붕괴는 우리의 손을 풀어놓는다.

이제 서방 정부들의 장기적 목표는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하는 것이 모스크바가 우크라이나와의 관계에 있어 절제의 강요가 아니며 국가의 불안정화와 이상적으로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타도 및 정권 교체에 있음이 완전히 명확해졌다. 그것이 서방 국가들이 2014년 여름 키예프의 ATO 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이유이다. 당시 키예프와 서방 수도들은 DNR 및 LNR 문제의 군사적 경로로의 해결 가능성에 대한 환상으로 통합되었다. 노보라씨야의 군사적 괴멸은 러시아와 그리고 푸틴 개인적으로 엄청난 정치적 패배였을 것이며 서방은 그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키예프가 8월 말 군사적 승리 전망을 상실한 후 우리의 서방 "동반자"들은 (민스크 휴전에도 불구하고) 반군에 대한 군사적 압박 전술을 사용하며 장기적인 푸틴의 포위와 고립으로 선회하였다. 서방의 전술 선택을 비추어 볼 때 제재의 추가적 심화는 거의 필연적으로 보인다.

동시에 서방이 부과한 제한 조치의 약화 혹은 해제 가능성에 대해 명확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고의적 전술이며, 크렘린이 우크라이나에서 물러선다면 제재 협박은 계속될 것이고 서방은 상황을 최대한 압박하기 위해 점점 더 새로운 요구사항을 제시함에, 우선 노보라씨야를, 그 다음으로는 크림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주요 목표는, 반복하자면, 푸틴 정권의 불안정화와 러시아 전체를 최대한 약화 (특히 미국의 입장에서 분명히 나타남) 하는 것이다. 따라서, 크렘린에 있어 어떠한 후퇴도 불가능하므로 (서방의 압력을 포함하여) 돈바스에서의 현상 유지도 불가능해진다.

현 상황은 여러 면에서 3-4-5월의 상황과 유사하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는 키예프에 평화를 강제할 강력한 무력 개입의 전망을 열어놓고 있다. 러시아군이 봄에 투입되었다면 이 무의미한 돈바스 전쟁을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춘계에 서방의 제재를 회피하려던 모스크바의 헛된 열망으로 인하여 돈바스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혼돈으로 인도했으며 궁극적으로 동일한 제재를 부과받았다.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대체로 서방의 입장과 러시아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예단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견해는 안전보장과 관련된 러시아의 그 모든 권리, 이익 및 우려에 대한 완전한 불인정에 기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러시아의 그 어떤 행동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러시아의 이익 (및 NATO 군사 주둔의 확대 및 강화) 은 크림이 키예프의 통제 하에 유지되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더라도 그 어떤 경우에도 무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한 러시아측 입장의 어떠한 잠재적인 급진적 변화도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 우리의 "창백한 동반자"들은 선의의 제스처를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반전시키는 것이 유망하다. 이것만이 키예프가 러시아의 요구사항을 듣게끔 할 수 있으며, 키예프와 서방 수도 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궁극적으로 협상과 돈바스의 평화 보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현재 공개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모스크바의 의견을 고려하도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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