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캠페인과 새로운 작전 경향의 발전
Проблемы постсоветского пространства. 2022; 9(3): 338-353.
알렉세이 A. 크리보팔로프
RAN E.M. 프리마코프 기념 세계 경제 및 국제 관계 국가 연구 기관
초록
키예프와 모스크바 간의 공개적인 군사적 충돌은 후後소비에트 영역에서 통상적인 국제관계 과정을 뒤집을 뿐만 아니라, 정치과학에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숙련하도록 강제한다. 이러한 주제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전선이 구축된 문제이며, 이에 관한 면밀한 연구는 군사 이론가들에게 군사술에 대한 기존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올바른 아이디어를 정립할 수 있게 하는 질료를 제공한다. 후소비에트 영역에서 새로운 작전 형태가 발원하고 점차 완성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이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에 있다.
서론
C. 폰 클라우제비츠의 불멸의 명언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단순한 연속" 은 집단적 편견으로 인하여 국내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특별히 인기있었던 적이 없었다. 2022년 2월 24일 밤 우크라이나가 갑작스레 러시아 외교 정책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을 때 후소비에트 공간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경험한 충격은 더욱 강렬했다. 장기간의 분쟁은 한계점에 이르렀고 작전적-전략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고려사항은 무기한적으로 의미를 상실했다.
현실과의 연관을 복원하려면 후소비에트 공간의 미래가 우크라이나 캠페인의 결과로 인해 직접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솔직한 인정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분석과는 다른 연구 관점이 요구된다. 오늘날 "소프트 파워" 와 국제 관계의 제도적 틀에 대한 외교에 관한 모든 고찰은 사실상 전투 상황의 구체적 사실의 분석으로 축소되었다.
키예프와 모스크바 간의 군사적 충돌은 그 이전의 정치-군사적 충돌에 비해 적지 않은 질문은 제기하였다. 많은 이들에게 놀라웠던 것은 섬광같은 러시아의 승리 부재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전선의 구축이었다. 정적 위치(진지) 균형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연대적으로 가까이인 2003년 봄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전격전보다 제1차 세계대전, 에스파냐 내전 및 끝없는 시리아 내전을 더 연상시키게 했다. 21세기 대규모 정규군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고대 작전 형태가 환생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겨졌다.
기동 단계는 러시아 VKS의 우위, "세계 제2군" 의 풍부한 기술적 장비도와 그러한 광대한 전역에 관련된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수에도 불구하고 이는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다. 이 초기 기동 기간은 최종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고 공간 내에서 당사자들의 이동으로만 이어졌다. 초기 배치의 과실을 수정하고, 키예프, 하르코프, 니콜라예프에 대한 포위 공격을 종료하고 전체 전선 연장延長을 감소시켰으며 러시아 사령부의 초점이 돈바스로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세 작전이 이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하지 못한 이유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21세기의 위치 교착 상태
"진지-기동"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은 20세기 총력전 시대에 의미론적 핵심으로 군사술에 스며들었다. 진지화는 전장에서 완전한 부동성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일일 진군이 기껏해야 수백 미터 단위로 측정되면 종심 돌파가 불가능해지고 적 보급선을 차단하거나 무질서하게 퇴각시키기 어려워진다. 본부 지도에 표시된 포위망은 오래도록 열려 있다. 공격자는 방위 노드를 천천히 부수고 적을 점령지에서 강제로 몰아내야 한다. 돈바스의 봄-여름 전투는 그러한 예시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캠페인은 괴멸이 아닌 고갈 방법으로 수행된다 [1]. 대부분의 경우 증대되는 물질적, 도덕적, 심리적 피로에 대처할 수 없을 때 패배한다.
"기동전"이라는 문구는 일반적으로 1944-1945년 붉은 군대의 종심 작전을 연상시킨다. 수백만의 병력, 수천의 전차, 항공기 및 포가 동원되어 전선에서 상당한 공간적 변동이 수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성공적인 공세를 위해서 하루 수십 km씩 진격하여야 했다.
최근 수십년 간의 기술 발전으로 훨씬 더 신속한 공세 속도가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2003년 봄 바그다드 회전會戰, сражение 간 미군은 40시간 미만에서 350km를 주파하였다. 공세 첫날에만 제3 기계화 사단 선견 부대가 약 240km를 이동하였다. 때때로 부대의 평균 행군 속도는 38km/h에 도달하였다 [2, p116]. 미국이 사담 후세인의 군대를 완전히 격멸하고 500만 인구의 수도를 점령하는 데에는 불과 3주가 소요되었다. 국경을 넘은 지 불과 1주일 만에 러시아군의 진격이 본질적으로 중단되었을 때 당연히 비슷한 수준으로 빠른 VSU의 붕괴를 예상한 러시아 및 외국 전문가들이 당황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선의 형성은 공세 수단에 대한 방위의 자명한 우월성으로 인해 촉진되었다. 참호, 철조망 및 콘크리트 특화점特火點은 공격하는 보병에게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처럼 보였다. (3국) 협상에서의 전차 출현과 독일군의 강습 집단 전술 전환만이 참호전의 교착 상태에서 탈출할 방법을 설명했다 [3].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의 장차 발전은 차량화의 성장선을 따라갔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자율적 기동 제대를 통해 거의 모든 방위 밀도의 전선을 괴멸시킬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진지 위기는 대개 포병이 공격 구획에서 적의 대전차 방위를 강력히 제압하지 못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장갑기술품 지원 없이는 보병은 항상 행동할 수 없었다.
분명하게, 미래의 새로운 작전 경향을 이해하려면 군사 과학이 다른 설명 범주를 이용해야 하며, 1920-1930년대의 상황과 유사하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적 장치가 만들어져야 한다. 현재로서는 우리는 거의 1세기도 전에 공식화되고 성문화된 정의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4, 5, 6, 7, 8].
물론 우크라이나에서의 전략적 전선은 양차 세계대전의 현실과는 매우 다르다. 이는 오히려 공격자를 기술적 정찰 수단으로의 탐지와 효과적 화력 교전 지대로의 유인이 교차하는 다소 관습적 선의 형태로 존재한다. 2014년부터 VSU가 체재한 도네츠크 지역 구역을 제외하고는 적에게는 장기 방위 경계가 부재했다. 방위는 대규모 정착지 주변의 독립적 근원지에 의존하며 이들 사이에는 상당한 작전적 진공пустота이 존재한다. 양측으로 노출된 군의 얇은 장막은 이 광활한 공간을 엄폐하기보다는 관측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장애물조차 우크라이나 영토 깊숙히 진출함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종군 기자들은 돈바스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밀도가 평균적으로 전선 5.5km 당 대대 전술 집단 하나를 초과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이는 대조국전쟁 요무령要務令, устав에서 요구하는 밀도보다 약 15배 낮다. 공세는 매번 제한된 종심에 가해지는 일련의 국지 타격으로 전화轉化된다. 적이 전투에 예비를 투입하여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데에 성공하면, 이후 타격은 전선 인접 구획에 가해진다. 연속적인 분쇄 타격으로 상대의 전선이 점차 느슨해지고, 천천히 서쪽으로 이동한다. 4월 이후 우리는 포파스나야, 리만, 세베로도네츠크, 리시찬스크, 세베르스크, 바흐무트, 슬라뱐스크 및 크라마토르스크에서의 치열한 전투에서 이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고착화된 위치 평형에는 체계적인 전제조건이 있으며 임의적인 상황의 합치에 의해 지배되지 않았다. 전진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화력 대항의 약한 벽이라도 무너뜨려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군이 충분한 관통 타격력을 보유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좌안에서의 치열하고 피비린내나는 전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서부 전선의 결함적 도식이 수 차례 반복된다. 공격자는 전술 방위 지대를 극복했더라도 방어자가 침투를 봉쇄하고 공격 구획에서 중단된 화력 시스템을 복원하기 전까지 작전적 공간으로 돌파할 시간이 부재했다.
소셜 네트워크에 게시된 수많은 자료들로 판단할 때, 상황에 대한 설명은 대 부분 네 가지 가정 중 하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2월 24일 전야에 러시아의 전략적 집중 단계에서 발생한 실수와 이에 따른 작전 방면 간 최적이 아닌 병력 분배가 강조된다. 얇은 계선кордон에의 병력 배치로 예비가 급속히 고갈되었다.
둘째, 서방 분석가들은 러시아군의 낮은 전술적 효율성을 비난하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미국의 전쟁 기계가 가상적으로 러시아의 위치에 있었다면 적을 쉽고 자연스럽게 흑토와 혼합해 버렸을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이러한 버전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비누거품"이다.
셋째, 크렘린 최고지도부의 동원령 선포 없이, 징집병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평시군으로만 행동하기로 한 결정은 종종 비판받는다. 이 결과로 병력 부족 및 후방 배치의 부재 상태에서 작전이 개시되었고, 따라서 러시아의 공세는 시작도 전에 중단되었다.
넷째, 다수의 전문가들은 제병협동전의 현대적 원칙이 작전 상황의 조건과 일치하지 않음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대대 전술 집단 개념은 상급 제대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사격 수단의 분산을 유발하며 신중한 정면 타격을 불가능케 하는 수많은 "미세군микроармия" 샐러드를 만든다. 결과로 러시아군은 상대 전선을 극복할 수 없고 종심에서 전과를 확대할 수 없었다.
집중 및 배치 단계에서의 실수
2월 24일 전야의 러시아의 군사적 사전준비는 파멸적 타격 준비보다는 화려한 시위를 위한 것이었다. 기만маскировка의 흔적이 없는 완전히 개방된 전략적 집중의 특성은, V. V. 푸틴이 마지막 순간까지 우크라이나와 서방 열강들이 최소한의 러시아 외교정책 요구를 수용하기를 희망했음을 나타낸다. 짐작 가능하듯, 군사적 결정은 VSU가 격렬히 저항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엘리트가 모스크바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준비되었다.
키예프 정권의 빠른 붕괴에 대한 가정은 실현되지 않았다. 계선 배치 형태는 러시아군이 야전에서 직면한 상황과 완전히 맞지 않았다. 다수 방면에의 기이한 동시다발적 행동은 예비를 빠르게 고갈시켰다. 전술적 성공의 합은 작전적-전략적 결과로 확대되지 못했다. 따라서 캠페인의 첫 단계에서 러시아는 VSU를 무너뜨리는 데에 실패하였다.
3월 초 러시아군은 키예프에서 니콜라예프에 이르는 2000km 연장의 희박한 전선에 배치되었으며, 주공 방면을 표시할 적절한 전투 서열을 갖춘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 일 내로 조직적인 저항이 중단되었다면 올올이 배치하는 것이 최적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는 발생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이 후방의 대도시를 동시에 포위하고, 늘어진 통신선을 보호하며 우크라이나 영토 깊숙히 진출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관측하기로는 잔여 병력이 있었으나 동시에 도시 광역권을 차지하기에는 불충분했던 니콜라예프 및 키예프 병력이 조기 철수하면서 돈바스 방면의 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제외되었다. 이 30-40개 대대 전술 집단은 기습 효과가 최대화되는 작전 초기 단계에서 하르코프를 신속히 점령하고 파블로그라드 호弧를 절단하고자 하는 러시아 사령부에게 충분하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3월 첫째 주가 끝날 무렵 배치 실수를 깨닫고 러시아 정치 지도부는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3월 30일 키예프, 체르니코프 및 수미에서 철군이 시작되었다. 드네프르 하류의 보즈네셴스크 및 크리보이 로그 방면으로의 작전이 중단되었다. 철수 결정은 옳았지만, 평판의 관점에서 볼 때 극히 고통스러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19세기 중반에도 H. 폰 몰트케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군의 초기 집중에서 저질러진 실수는 전체 캠페인 간에 거의 수정할 수 없다" [9, p178]. 다행히도, 공중 우위와 VSU의 낮은 기동성으로 인하여 러시아 사령부는 무사히 재편성을 실시하였다. 작전 방면 수의 감소는 소위 파블로그라드 호 익측 러시아군 전투 서열의 밀집을 의미했지만 반대로 시간을 절망적으로 상실하였다. 기동전은 재개되지 아니하였다.
물론 배치 실수는, 공세 속도 손실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지만 이후의 전체 과정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정도 치수의 작전은 기습의 효과와 최초 타격의 녹아웃 충격에만 근거하여 구축될 수 없다. 전투의 초수初手가 최고의 형태로 상연되지 않았더라도, 이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전선이 형성되고 이를 파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러시아군의 전투 기량мастерство
국가의 군사적 명성은 종종 "The Military Balance" 의 공식 순위와는 관련이 없다. 그 마법의 후광은 승리의 영광 뿐만 아니라 여론의 거울에 비친 영광의 광선이 굴절되어 만들어진다. 예시로, 1971년 12월 동파키스탄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포로 수 측면에서 전례없는 사건이었으나 현대 인도의 군사적 명성은 서구의 이스라엘에 비할 바 없다1.
1. 1945년 이후 세계에서 9만 명이 항복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군의 기술적 장비도를 제외하면, 특정 국가의 군사력이 대중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경외는 측정가능한 매개변수로 표현하기 어렵다. 상급 군 지휘부의 제도화институционализация, 인력 구성 직무 연수 조직, 자격 요건 및 전술적 준비 방법, 동원 장치의 효율성, 군사 이론 및 본부 문화 수준 - 이 모든 것을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미지의 힘은 힘의 이미지보다 강하다...
역사의 장張, страница에서 유럽적 근대성이라는 어설픈 외관에 가려진 아시아 무리horde로서의 러시아에 대한 고정 관념은 "스팀 롤러" 형태의 군대 이미지를 의미했다. 동쪽의 이웃에 대한 유럽의 만성적 콤플렉스는 러시아 군인을 완강하지만 의지가 부족하고 책임감도 없으며 자율성을 행사할 수 없는 바이오로봇으로 묘사하도록 부추겼다. 기실 러시아의 국력 상승, 물질 문화의 진보, 전쟁에서의 승리는 이러한 편견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심리적 콤플렉스는 무의식에 속하므로 여기서 경험주의는 무력해진다.
냉전기 간 소비에트 군사 조직의 부정적 특성과 자질에 대한 미국이 채택한 인식은 종종 독일 베어마흐트 베테랑들의 평가2를 반복하였다. 1970-1980년대 심층적 구조 개혁 시기를 겪고 있던 미군에게 있어 전장에서 수없이 입증된 독일 군사 시스템의 전문적 우수성은 항상 고무적인 예시가 되었다. 전직 히틀러군 장군들의 견해는 미국인들이 잠재적인 적에 대해 듣고 싶어하는 것과 대체로 일치하였다.
2. 소비에트 무장군 연구가 직업이었던 D. 글랜츠 대령과 같은 미국 장교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방향에서 변함없이 초연했으나 이들의 영향력은 협소한 군사사학계를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미국의 주요 전략 이론가인 E. 루트왁은 "오토마타처럼 행동하는 군인들의 무감각함에 대한 개념은 모든 충돌에 수반되는 적의 비인간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고 제안하였다 [10, p194].
1980년 5월 독일의 전투 경험 분석에 관한 회의에서 - 러시아인들이 고유한 전술적 치둔痴鈍성을 극복할 기회가 있는가 - 에 대한 미국 장군의 질문3에 대해 베어마흐트 기갑군 장군이었던 늙은 H. 발크는 간단히 말했다: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 - 공교육의 진보와 국가 물질 문화의 성장과 관련하여 러시아 인적 자원의 자질이 향상될 것인가 - 라는 명확한 질문에 F.V. 폰 멜렌틴 소장은 이하와 같은 문구로 반박했다: "그들은 대중이고, 우리는 개인이다. 이것이 러시아와 유럽 군인의 차이점이다"4.
3. 이 회의에는 미 육군 참모차장 G. 오티스 중장과 합동참모본부 대표 P. 고먼 중장 및 군사 교리 개발국장이자 "後베트남" 개혁의 핵심 인물인 W. 디퓨 중장도 회의에 참석했다.
4. Generals Balck and von Mellenthin on Tactics: Implications for NATO Military Doctrine by General William DePue (U.S. Army Ret.). BDM Corporation, December 1980. Reproduced and Edited by Reiner K. Huber Universitat der Bundeswehr Munchen, December 2004.
냉전기 동안 서방에서 소비에트 군의 전술적 번잡성이 과대평가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특정 전투 기술навык 의 저개발로 추정되는 이유가 종종 오해석되었다. 소비에트 무장군이 시련으로 단련하였던 총력전 경험은 현저한 특수성을 가졌었다. 수반되는 조직 변형의 희생자는 대부분 개별 병사들의 훈련과 소형 구분대의 준비였다.
이는 이하의 예시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1941년 소비에트-독일 전선 킬로미터 당 붉은 군대 대대는 평균적으로 1개 미만이었고, 1942년 말까지 이는 2-4개 대대에 도달하였다. 1944-1945년 이는 6-8개까지 증가하였다 [11, p24-25]. 1944년 야시-키시네프 작전 동안 소비에트 소총병 사단은 평균적으로 전면 5-6km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주공 방면에서는 전면 각 킬로미터 당 사단 하나, 전차 15-20대 및 포 240문이 있어야 했다 [11, p25]. 1945년 비슬라-오데르 작전 간 결정적 방면에 대한 붉은 군대 병력 집중도는 전면 1킬로미터 당 대대 8-10개로 증가하였다. 이토록 조밀한 전투 서열에서는 물리적으로 이니셔티브를 잡을 여지가 없었다 [11, p25]. 수백만 병력 군대들의 전투에는 대규모 군의 조직적 통제, 목표에 맞게 수십 개의 사단 및 군단의 이동을 오차없이 계산하고 확고하게 지시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였다. 이는 단일 대대 지휘관 기량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 평준화했다. 소형 구분대를 통제하고 상급 본부의 제어 밖에서 행동하는 기술은 잔여 원칙에 따라 수행되었다. 총력전에 대한 지향은 1945년 이후 소비에트 무장군에서 보존되었다.
아마도 이 전통은 우리 군대의 집단 심리학의 일부가 되었으며 현대 조건에서는 비판적으로 재고하여야 한다. 군사 건설의 목표는 일반적으로 합리적 고려의 대상이며 주로 국가 경제의 가망성에 의해 제한되므로, 군대 개선 경로에서 외생экзогенный 사회문화적 장애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E. 루트왁은 자신의 구상을, "징집병과 예비군으로 장비된 소련군은 돌진할 능력은 있으나 전술적 기량은 부족했다. (...) (그들은) 적어도 명령이 합리적인지에 대한 여부에 관계 없이 명령에 복종하여야 하는, 하위수준 지휘의 무감각에 시달렸다. 이는 타고난 문화적 제약이나, 물론 모든 수준에서 광범위한 주도권은 요구하는 공식적인 교리를 반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제도적 인센티브의 실질 균형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친다: 비록 성공적인 이니셔티브로 인한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더라도, 사령부에 의해 승인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실수에 대한 처벌은 비생산적인 복종에 대한 처벌보다 체계적으로 더 가혹하다" 라고 정교화했다 [10, p192, 194].
비슷한 출발 조건에 직면한 미군은 소비에트 군의 경험을 반영한 작전 형태에 의존했다. 예를 들어, 1991년 걸프 전에서 구분대의 행위는 기설정 경계 내에서만 허용되었다. 상급 본부는 예하대를 끊임없는 미세 제어 하에 두었다. 대대장 뿐 아니라, 여단 및 사단장에게조차 이니셔티브가 부여되지 않았다. 모든 제대는 중앙집중적으로 통제되었고 대담한 기동 대신 전열에서 전열로 순차적인 이동이 관찰되었다. 자유로운 작전적 창의성은 군단 본부 수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1, p35; 12, p269].
이 "체계적 전투"에서 미국 독립 대대들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호플리테스처럼 좌우의 인접 부대들에 의해 단단히 압착되었다. 이 모든 것은 전투상의 군 통제에 있어 후진적인 소련과 선진적인 미국의 전통을 대조하려는 시도에서 잊혀져서는 안된다. 미국의 총괄적인 기술적 우위는 차치하고서, 전투 통제의 원칙 측면에서 미군은 생각보다 러시아군과 훨씬 더 유사하다5.
5. 1976, 1986 및 1993년의 FM 100-5 야전요무령에서, 유연한 지시 통제에 대한 독일의 전통적인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독일은 "Auftragstaktik"의 정의를 "Befehlstaktik"의 안티테제로 사용하였다. 가장 가까운 미국의 유비類比는 "mission-type order" 개념이었다. 2012년 개정된 ADP 6-0 요무령에만이 이러한 방법의 주요 아이디어를 비교전 온전히 표현하였다 [13, p50]. 이것은 상급 군 통제 시스템과 이에 따른 독일의 고전적 군사 학교가 발전시킨 육성 및 전문 양성 원칙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조건의 조합에 기인하였다. 미국인들은 외형은 모방할 수 있었으나 경외의 대상이 된 지적, 문화적 환경을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데에는 천성적으로 무력하였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대등한 적과 우크라이나에서 전투를 벌였다. 2010년대 개혁을 통해 상대적으로 수적인 컴팩트화와 원정 모드의 국지 작전을 지향하는 러시아 지상군은 4천만 인구를 지닌 국가와의 전면전에 직면하였다. 본부 군 통제를 개선하고, 기술적 장비도 및 전술적 준비도를 향상시키며, 구분대의 최적 조직-정원 구조 탐색을 모색하는 것은 모두 실수에 대한 근본적인 과업을 요한다.
동원 문제
조직 관점에서 현대 러시아군은 전통적인 감편-예비 원칙을 포기하고 거의 15년간 완전 전투 준비 상태로 존재하였다. 예비군에 의해 완전한 정원수가 배치되는 감편 사단은 이미 오래전에 해체되었다. 명목상 기훈련 예비запас가 존재하지만 러시아군에는 동원 시 이를 흡수해야 하는 예비 감편구성 제대가 부재하다 [14, 15]. 그러나 무장 충돌이 특정 규모를 갑자기 초과할 경우, 상대적으로 소수의 상비군은 할당된 전투 임무의 양을 감당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6. 동시에 국가의 군사-정치 지도부가 신속하게 수를 증강할 수 있는 메커니즘도 부재하다. 이것이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6. V.B. 카신. 21세기 첫 번째 대전쟁 // 국제 정치의 러시아. 2022년 6월 22일. https://globalaffairs.ru/articles/pervaya-bolshaya-vojna-xxi-veka/ (접속일 2022년 7월 10일)
상대적인 기술적 우위는 러시아 지상군과 VDV의 양적 약점을 보상하지 못했다. 알다시피, 개전과 함께 러시아 항공대는 공중 우위를 달성했지만, 적 VVS의 전투 행위가 완전히 중단되었음을 의미하는 완전한 지배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사태는 "사막의 폭풍"이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캠페인이 아니라 오히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말기의 이스라엘 항공대나 1971년 말 파키스탄 전선에서의 인도 VVS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당시에 공중전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패측은 고정익기와 회전익기를 공중에 띄울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유지하였다.
추정에 의하면 러시아 항공대의 전투 작업 강도의 실제 한계는 일 200-300회 출격이다. 자명히, 이것은 객관적 필요보다 훨씬 낮다. 적의 PVO가 완전히 제압되지 않았음에 전투 행위 전구를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때때로 고가의 순항 로켓을 소모하여 명백하게 부차적인 목표를 타격하여야 한다. 판단할 수 있는 한, 우크라이나의 방위는 주로 포병 화력에 기초한다. 무인 비행 장치의 부족은 전술 정찰 가망성을 크게 줄이고 대포병전 효율을 감소시킨다.
I. 토프치에 따르면,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일반적으로 15만의 러시아군이 60만의 우크라이나군과 싸운다고 주장하는 일반적인 오해가 퍼져있다. 개전 무렵 VSU는 20.9만을 보유했다. 그 외에 영토 방위군에 10.2만, 국가 근위대 및 기타 준군사 편제에 13만이 있었다. 총 43-44만 중 10만 가량이 민간인 신분이었다. 키예프의 공식 자료에 의하면 2022년 4월 말까지 약 19만 명이 세 번의 순차적 동원 파동으로 무장군에 투입되었다. 동시에 다양한 추정에 따르면, 손실은 탈영병 2-3만을 제외하고서 약 4-5만에 달했다. 따라서 모든 동원 조치의 결과에 따라 5월 초까지 약 55만이 대열에 존재하여야 했다. 5월 15일부터 우크라이나 사령부가 10만을 소집할 동원 제4파가 예상되었다. 따라서 여름까지 대열에는 62-65만 명 가량이 있어야 한다. 이들 중 약 15만 혹은 25% 가량이 활성 병력이었고, 잘 정연된 구분대는 6-7만 혹은 서류상의 10%를 넘지 않았다7.
7. I. 토프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동원. 당사자들의 진정한 잠재력에 대한 질문. 2022년 5월 10일. https://boevojlistok.ru/34550-mobilizacija-v-rossii-i-na-ukraine-voprosy-realnogo-potenciala-storon.html (접속일 2022년 7월 10일)
공식 군사 계획 문서가 연구자들에게 제공될 때 까지 우리는 2월 24일 사건을 앞두고 러시아군의 전투 배치 과정을 자세하게 재구성할 수 없다. 주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알려졌기에 근본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간접적인 자료를 기반으로, 다수의 전문가들은 예비군의 은밀한 징집과 계약병контрактники 모집이 연초에 시작되었다고 제안한다. I. 토프치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될 때 까지 러시아는 국경에 19-20만 가량을 집중시켰다. 외부 계약으로 이전한 후 민간인 비중이 우세해진 후방тыл 구분대는 17-20만으로 계수되었다. 함대와 VKS에 7-8만이 더 있었다. 후방이 없는 로스그바르디야에는 6-7만이 있었다, 동원 후 LDNR군은 후방 구분대와 함께 수만명을 배치할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후방 구분대와 민간인을 포함하면 70-80만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활성 병력은 12-15만을 초과하지 않았으며 이중 약 절반은 LDNR군이었다. 2-5월 간 진행된 추가 동원 조치와 동시에 후방의 성장으로 러시아군과 LDNR 인민 민병대의 수는 거의 백만에 이으렀으나, 이 중 활성 병력은 15-20만을 넘지 못했다8.
8. Ibid
자명하게, 러시아 집단의 향후 양적 증강은 극도로 시간소모적인 무無에서 신규 부대 및 제대 편성이 아닌 기존의 조직 구조를 활성 병력으로 포화시키는 방법으로 달성될 것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6-7명 분대를 11-13명으로 증가시키고, 소대에 4번째 분대를 추가하는 것이다. 전쟁 초의 미장비도를 감안할 때, 이는 초기에 비해 활성 병력의 수를 거의 두 배로 늘릴 수 있다. 소대 내 4번째 분대를 고려하여 중대에 4번째 소대를 증강하면 가설적으로 병력이 20-25만 명으로 상승한다. 대대에 4번째 중대를 추가하면, 그 병력이 천 명으로 증가한다. 대대 전술 집단을 해체하고 포병과 전차를 연대, 여단 및 사단 예하로 복원시키고 세 번째 대대를 전구에서 활동하는 제대에 직접 도입하면 또 다른 7-8만의 활성 병력이 추가된다. 동시에 여단과 사단은 각각 5-6천, 1.5-2.5만을 보유하게 된다. 보조 민간 인력의 참가를 고려하면 전투 잠재력을 40-50만의 활성 병력을 포함하여 150만으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다. 이는 미래에 VSU에 대한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보장할 것이다9.
9. Ibid
양차 세계대전과 달리 2월 24일 전야 러시아군의 전략적 배치는 폭발적인 단일 동원과 관련이 없었다. 따라서 무장 충돌이 전개됨에 따라 전투력이 추가로 증강된 것도 A.A. 스베친이 저서에서 언급한 "영구 동원"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1, p131-134].
병력 부족에 대한 문제에는 마법같은 해법이 없다. 가장 현실적인 전망은 I. 토프치가 소고에서 총체적 도식을 설명한,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완화 동원"이다. "무장 인민"과 "시민-전사"라는 사회적 개념은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양 대규모 군대의 대결장이 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전장의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초기에 컴팩트한 병력수였던 야전군은 점차적으로 대열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대대 전술 집단에 관하여
전쟁에서 전투를 지도하려면 지휘 당국은 유연성과 중앙집중화 사이의 조화로운 결합이 필요하다. 과도한 중앙집중화는 군 통제를 마비시킬 수 있고, 과도한 유연성은 타격력 부족에 기인한 전술적 무력無力으로 변질된다. 이론상 대대 전술 집단 (BTG) 개념은 구분대에 무한한 가소성пластичность을 부여했지만 안정적인 방위를 극복하는 데에 필요한 화력 수단의 분산과 정면 타격력의 감소로 차있었다. 즉, 좋은 약도 과용하면 독이 될 수 있다.
회의론자들은 러시아군이 잘못된 BTG 개념을 맹목적으로 고수함으로써 강철 망치 대신 장난감 거품 망치로 적을 기절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정찰 및 전투 통제 시스템의 기술적 약점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을 고려해야 한다: 1) 과거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현재에는 명백하게 나타난, BTG 개념에 근본적으로 불가피한 결점이 있는가와, 2) 러시아군이 이러한 개념을 따라갈 능력이 있는지 혹은 효과적인 BTG 조직은 서방군만이 사용하는 품질이 필요하기에 단순히 충분하게 성숙하지 않았을 뿐인지의 여부.
회고적 분석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병협동전은 이미 조합적 특성을 띄고 있었다. 전기 내내 독일 전차 사단 전투단kampfgruppen은 혼성 원칙에 따라 확립되었다. 상황의 요구에 따라 기갑, 차량화보병 및 정찰 대대 및 포병 대대의 다양한 조합이 연대 전투 지휘부에 배속되었다. 전쟁의 2단계에서 여단으로 구성된 소비에트 기계화 군단이 구조적으로 근접하다. 대대는 전투 집단을 조립하는 보편적인 건설 자재 역할을 했다. 독일과 소련군은 일부 예외가 있긴 했으나 대대 자체를 분할하지는 않으려 노력했다.
미군에 대해 말해보자면, 보병 사단에서 연대 전투 집단 또한 동종 대대들로 조립되었다. 그러나 이미 1942년부터 기갑사단 조직에 BTG 개념의 징후가 포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간 미국 기갑사단은 각각 3개 기갑 및 3개 기계화 대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상황의 요구에 의존하여 포병 및 보조 구분대와 함께 3개 전투 집단 (combat command) 에 서로 다른 비율로 배속되었다 [2, p48]10. 차례로, 이 전투 집단은 두 개의 대대 집단 (task force) 으로 분할되었고, 그 내부의 중대는 혼성이었다 [2, p49]. 따라서, 지휘 연쇄의 계층적 고리만이 선택의 대상으로 남았으며, 이 시점에서 동종 구분대들은 혼성 대대 혹은 연대/여단으로 변모하였다.
10. 기실 이들은 미래 여단 전투단의 원형이었다.
1963년 개혁과 "새로운 구조의 개편 제병협동 사단"11 도입의 결과로 미군 전체 규모에서 대대 전술 집단 원칙이 확산되었다. 금후今後 새로운 유형의 여단은 영구적 편제를 포기하고 다양한 조합의 사단 대대 2-5개를 할당받는 참모 지휘부로 변화하였다 [2, p61].
11. 약칭: ROAD (Reorganization of Objective Army Divisions)
미군 여단 내에서 "battalion task forces"는 다른 구분대의 동등한 대대에 교차 배속되는 하나 이상의 중대를 갖는, 기갑 혹은 기계화 대대를 의미한다 [2, p62]. 따라서 대대 집단은 기갑 및 기계화 보병 중대로 구성될 수 있었다. 같은 원칙에 따라 편성된 대대 전술 집단 내의 독립 중대는 기갑 및 기계화 소대로 결합될 수 있었고, 그 결과 부대는 중대 전술 집단 혹은 "company team"으로 명명되었다 [2, p62]. 미군에서 중대 전술 집단 개념은 정착하지 못했고, 1980년대 중반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2, p82]. 그 이후 BTG는 1986년 개혁과 후속 변화의 파동에서 살아남은 전투 조직의 기초를 구성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BTG 원칙 자체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연대와 여단 내의 동종 대대들로 구성된 혼성 전투 집단이나, 동종 중대로 구성된 혼성 대대 집단은 동일한 조직 원칙 하에서 구현된다. BTG 개념은 선형 대대를 전차, 차량화보병, 포병, 정찰 및 보조 구분대로 구성된 "미세군"으로 전화轉化시킨다.
러시아군에서의 대대 전술 집단의 출현은 첫째, 국지적 분쟁의 경험, 둘째, 상급 제대의 수가 수 차례 감소하였으며, 셋째, 대열 상의 인력 부족이라는 만성적 문제로 인하여 예정되었다. VSU가 입수하고 이후 우크라이나 소셜 네트워크에 게시된 정원 문서에 의하면, 2월 24일 월경한 러시아 BTG는 전투에서 긴밀한 상호작용의 필요성을 고려치 않고 형식상 기계적으로 창설되었다. 작금의 재앙은 구성에의 전반적 불균형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조직적 난점은 분명히 기술적 장비도의 질質과는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적에게 패배한 3월 초 제2 타만 차량화소총병 사단 제1 전차 연대 BTG는 전차 중대 3개, 견인 곡사포 4문 및 차량화소총병 소대 1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시에, 국지 분쟁의 경험은 BTG에서 최적의 전차 및 차량화소총병 중대 비율이 1:1로 달성됨을 명백히 입증하였다12. 이와 관련하여 관찰자들은 러시아 기술품의 조밀한 체재로 인해 포병 화력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이 초래되는 경향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전차 31대에 불완전한 곡사포대가 배속되어 있고 호위 보병이 25명에 불과하다면 전투에서 전차를 지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휴식 상태에서 기술품을 경호하는 것 조차 충분치 않을 것이다. 당연히 험준한 지형에서 엄폐물을 박탈당한 전차병들은 본능적으로 밀집하게 되어 적의 포병 및 대전차 복합체의 쉬운 표적이 되었다. 사령부는 사실상 동종 전차대대를 수미 숲으로 밀어넣었고, BTG로 지정하는 것은 단순히 사무적 형식에 불과하였다. 후속 실패는 아주 자연스럽다.
12. 정찰 구분대도 이에 고려된다.
불운한 타만 사단의 BTG와 이라크 캠페인 간 제3 기계화 사단의 선봉에 섰고 2003년 4월 2일 처음으로 유프라테스를 도하했던 미국의 전형적인 BTG를 비교해 보자. BTG는 E. 마르코네 중령이 지휘하는 제69 기갑연대 제3 대대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여기에는 M1A1 "에이브럼스" 전차 중대 2개, BMP M2A2 "브래들리" 기반 기계화 중대 2개, 공병 중대, 정찰 소대 및 120mm 자주 박격포반 4개 등이 포함되었었다. 또한 전투 중 BTG 3-69는 전혈全血 포병 대대, 즉 M109A6 "팔라딘" 6포반 포대 3개의 지원을 받았다 [16, p289]. 이 경우 강력한 포병 철권을 갖추고 자체적인 눈과 귀를 보유하며 활력있게 공격할 뿐만 아니라 점령지를 완고히 방어할 수 있는 완전한 "미세군" 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비능률적 BTG를 편성하는 관행은 사보타주나 범죄적 무능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여기에서 적어도 두 가지 합리적 설명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상술한 바와 같이 수백만의 군대를 위해 작성된 우리의 낡은 요무령과 전술 교범은 중대-대대 수준의 구분대를 유연하게 사용하기 어렵게 한다. 둘째, "신형" 군대에 속한 병력이 극도로 부족하다. 2014년 이후 신규 창설 사단을 고려하면 전시에 가까운 상비 태세를 유지하기 위해선 지상군과 VDV에 35만이 아닌 50-60만의 병력을 배치하여야 한다. 러시아의 군사 예산은 그러한 부하를 감당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인력부족은 1960-1970년대 전환기에 이스라엘 IDF의 상황을 다소 상기시키는 어려움을 야기하였다. 전차로 만선이 된 군대는 국가의 제한된 인구통계학적 자원으로 인해 잔여 원칙에 따라 인력을 장비하게 되어 차량화보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동원에 대한 정치적 결정의 부재는 이러한 군사 구축의 결함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실패한 것은 BTG 개념이 아니라 러시아군의 실제적 구현이다. 그러나 전술 집단이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으로 창설되었더라도 이들은 위치 교착 상태의 확립을 거의 막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전쟁에서 조직 형태는 전술 조건에 따라 항상 어떤 식으로든 적응한다. 대대가 "미세군"으로 변형되는 것은 주로 전선의 낮은 작전적 밀도로 인한다. 전투력을 크게 신장시키지 않고서는 전쟁을 다시 기동전으로 돌리는 것은 일견 불가능해 보인다. 적의 무장 전선은 마음대로 붕괴되지 않는다. 명일 BTG가 단호하게 해체된다 하더라도 전투 서열의 밀도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BTG에 대한 유일한 실질적 대안은 화력 통제를 중앙집중화하고 타격의 관통력을 높일 수 있도록 본격적인 사단과 여단을 편성하는 것이다.
결론
서론에서 공식화된 가설을 검토한 바, 전선의 교착 상태를 하나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로켓-핵 진자는 여전히 확전의 나선이 회전하는 것을 막고 있지만, 장기전에 대한 전망은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다.
시작부터 이 캠페인은 인질 구출 작전의 요소와 함께 상당한 대테러 행위의 비율로 희석되었다. 판단할 수 있는 한, 작전의 산정에는 외부 고려사항이 혼재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초기 정치적 입력의 부정확성으로 인하여 부적절한 작전적-전략적 결정이 현실화되었다. 배치 실수는 선제타격의 위력을 반감시키고 모든 가능한 잠재적 이점을 발휘하지 못하게 했지만, 이러한 단점은 작전 후속 단계에서의 낮은 공세 속도에 대해서는 거의 책임이 없다.
저렴한 PR-효과의 추구, 전투 훈련의 모방 순간 및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의 총체적인 전술적 방임으로 당연히 군 상급 지도부는 명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의 군사 구축 과정에서 유발된 모든 실재 및 가상 실수는 전선을 경화시키고 위치 교착 상태를 확립하는 데에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끼쳤다.
BTG는 그저 기존의 작전적 전술 조건에 대응하는 조직적 적응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대해 대대 전술 집단 개념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대대의 두수를 가설적으로 두 배 늘리면 상급 제대의 중요성을 회복하고 BTG의 가장 고통스러운 단점이 상쇄될 것이다.
군사 이론 분야에서 다소 예상치 못한 발견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전선이 과포화된 전구와 그 반대 극단 양쪽에서 모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작금에는 기동성 회복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기술적 장벽은 부재하다. 교착 전선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외연적인, 즉 순전히 양적인 해법을 허용한다.
최전선에서 확립된 상대적인 위치 균형과 관련하여, 전투 작전의 향후 개발에 대한 예측과 가망성의 한계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궁극적으로 2열의 부대 및 제대의 편성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확실하게, 예비 축적 주제는 러시아에서 가장 엄격하게 보호되는 비밀 중 하나이다. "완화 동원"이 저울을 모스크바에 유리하게 기울일 때 까지, 최고 군사-정치 지도부는 국지적인 전술적 성공의 진전을 성립시켜 결정적 승리에 대한 장기적인 기대에 유리한 정보 및 전략적 배경을 구축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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