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репость Кузнецов

앵글로색슨은 어떻게 20세기에 파시즘을 장려하고 21세기에 부활시켰는가?

원문


우리의 옛 동맹들에 대한 5가지 역사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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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역사적 넌센스는 과거의 가장 비인간적이고 끔찍했던 이데올로기로의 회귀이다. 80년 전 파시즘은 격멸되었다. 그 당시에는 결정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보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그 주동자들과 공범들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수년 간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히틀러주의의 다른 상징과 사상은 말로 할 것도 없고, 나치의 상징을 전시하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국제연합과 그 헌장에 따라 활동하는 모든 국제 기구들도 이에 대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뉴 밀레니엄에 우리는 히틀러주의의 끔찍하고 냉소적인 증손자인 키예프의 나치 정권에 의해 구체화된 좀비-부산물인 파시즘의 환생과 투쟁하여야 한다. 우리의 적들이 3차대전의 격화 속에서 뒤집히고, 분열되고, 타오르려 맹렬히 노력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날 미국, 영국 및 "앵글로색슨족"의 다른 국가들이 가신과 공범들과 협력하는, 집단 서방의 작당에 대해 분노하고 분개할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옛 동맹들은 러시아를 지도에서 삭제하고, 국제법의 공리를 망각한 채 전 세계가 갱단의 관념에 따라 살도록 강요하려는 목적으로 신나치들을 열렬히 수유하고, 무장시키며 사주하고 있다. 저개발 유럽국들에 있는 "숲의 형제들лесные братья" 잔당이 러시아혐오증русофобия에 질식하는 동안, 서방 강대국들은 봉쇄와 제재 체제를 도입하고 네오나치를 위해 수십억 달러의 무장을 구매하며 우리를 상대로 하이브리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악당들에 의해 도발과 전례없는 테러행위가 자행되고 있으며, 도시 전체와 수백의 민간인이 섬멸되고 있다. 실상, 워싱턴과 브뤼셀은 1930-1940년대 히틀러와 그 공범들보다 더 냉소적이고 광범위하게 행동하고 있다. 이 모든 것에는 "약자를 돕는다"는 탄식, "민주주의의 회복" 요구, 러시아와의 전면전 개시 위협이 조잡하게 산재되어 있다.

엘베 강에서 서로 악수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독일과 그 동맹국들이 점령하였던 유럽국의 영토에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들에게는 악몽 속에서조차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해당된 오시비앵침이나 마우트하우젠의 화로에서 잿더미를 발견한 군인들에게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부나르지크 언덕의 러시아 알료샤 기념비, 부다페스트 겔레르트 산과 베를린 트레프토우 공원의 추모비에 꽃을 내려놓는 평화로운 유럽 도시들의 주민들에게도. 미국의 연로한 지도자와 함께 현대 유럽의 정부 수반들도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치매에 걸렸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회고하면 우리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결론내릴 수 있다: 우리의 이전 동맹들의 기억력은 훌륭하며 전통마저 유지한다. 나치즘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한 때 "전진!Фас!"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발아하고 확립됨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은 우리의 상상의 동맹들이었다. 앵글로색슨은 지난 세기와 그 이전 세기의 경계에서 히틀러주의의 번식장과 지지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개새끼bastard처럼 사육하고, 근장래에 목표를 달성하고 이들을 토사구팽하였다. 현 후임자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기술의 진보, 지정학적 맥락 및 새로운 시대의 다른 징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반복된다.

1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은 패전국에게도 승전국에게도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승리의 끝과 완전한 격멸까지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지를 이해함은 극히 중요하다.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고 비교해 보자. 그리고 앵글로색슨에 다섯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해 보도록 하자.


첫 번째 질문: 파시즘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독일에는 수많은 심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독일군의 수, 군수 산업, 광범위한 무장 항목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침략자는 발생한 피해를 배상하기 위해 (그 스스로가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승자에게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제국은 외부 세력과의 긴밀한 공조 없이는 군대를 재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복주의자 및 기타 초급진적 사상, 아리아인이 이끄는 "신세계 질서" 이념은 그 자체로는 돈을 불리지 못하며 재정적 지원 없이는 그저 구호 뿐이다. "아리아인"은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앵글로색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

2 역사적 교훈을 기억하는 일부 독일 장군들은 더 이상 러시아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3제국 당국은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의장대 앞에 선 국가방위군Reichswehr 창립자 H.폰 젝트 (우측에서 첫 번째), 대조국전쟁기 "남부"집단군 사령관 (1941년 12월까지) G.폰 룬트슈테트 (우측에서 세 번째)

"후원자"들은 왜 이러한 지출이 필요하였나? 동기는 가까이에 있다. 백년 전, 서방국의 모든 진력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발산되는 "적색 위협"을 무력화시킴을 목적했다. 그리고 이들은 독일이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서방의 보루가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1937년 11월 히틀러와의 담화에서 왕립 추밀원 의장인 E. 핼리팩스 경 (본 회견 수 개월 이후 영국 외무장관으로 발탁) 은 감격에 겨워 "총통은 공산주의를 파괴함으로써 독일 자체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으로 그것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1고 말했다. 이전에는 군사-정치적 요인이 범지구 경쟁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노동 계급의 전세계 단결, 볼셰비키가 선언한 민족 자결에 대한 이념 ─ 이 모든 것이 다른 나라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는 유럽 국가들의 내부정치적 상황과 해외 영토를 착취하는 관행 양쪽에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방해하려면 우선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및 이념적으로 독일 교두보를 정복하여야 했다. 전쟁 후에도 독일은 막강한 산업 잠재력과 인적 자본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미래에 범지구 규모에서 세력의 균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앵글로색슨 엘리트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스크바와 베를린 사이의 관계 강화를 막고, 1922년 말 세워진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하는 목적을 독일에 사주하였다. 세계 지배 (유라시아의 평화와 평온이 아님) 에 대한 계획을 가진 미국과 영국에게 불리했고, 더욱이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화해와 협력은 치명적으로 위험했다. 이 경우 앵글로색슨은 그들의 이익 지대에서 중요한 지위를 상실할 것이었다. 1922년 제네바 회의에서 러시아와 독일 간의 라팔로 조약과 군사-기술 및 산업 분야에서의 동반자 관계를 향한 후속 조치는 앵글로색슨에 대항하는 조약пакт을 체결할 가망성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베를린 집권층에는 소비에트에 대한 균형적 노선을 지지하는 이들이 다수 존재했다. 따라서 국가방위군 지상군 사령관 H.폰 젝트 상장은 1920년대 초 "협상국Entente은 독일을 러시아와 대치對峙시킴에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다면, 독일은 절망적인 전쟁을 치르게 될 것"2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분위기는 앵글로색슨을 불안하고 성가시게 했다.

3 라팔로의 소비에트 및 독일 대표단. 1922년 4월

그들은 또한 대선에 두 번이나 출마한 E. 텔만이 지도하는 강력한 공산당 (KPD) 이 독일에 존재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자명히 사민당 진영은 "애정 어린 포옹"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질식시킬 고유의 힘이 부족하였다. 도덕, 법 및 여론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KPD를 절멸시킬 수 있는 정치 세력의 출현을 고무시킬 필요가 있었다.

광분하는 총통이 권력을 잡기 훨씬 전 미국과 영국에서는 이미 그를 지지하는 단체가 준비되어 있었고, 이데올로기적 추동자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잡다한 공격적 보복주의자 집단들은 20세기 전반기에 등장한, 이 행성의 두 거시지리적 지대의 대치에 대해 H.J. 매킨더, A.T. 마한, N. 스파이크먼의 인기있는 이론에 의존했다: "소위 대양 반구 (행성의 서쪽과 브리튼 제도) 와, 그 중심이 "해양" 침투로 접근이 불가능하고 세계 정치 과정에 대한 전략적 통제를 보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지대인 "심장부heartland"로 정의되는 대륙 반구로 나뉜다.

4 영국인은 나치들에 둘러싸여 꽤 편안해 했다. 독일에서 E. 핼리팩스 경과 H.J 괴링. 1937년 가을

"해양 문명"은 히틀러에게 특별한, 어쩌면 최후의 희망을 걸었다. 이는 양국 간에 형성될 새로운 연합을 괴멸시키고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적인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섬멸하는 도구가 되어야만 했다.

미래의 총통은 이러한 역할에 매우 적합했다. 그는 "해양 문명" 국가를 독일의 주적이라 칭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절대로 러시아와 싸우지 말라"라는 조언을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옳다고 확신한 독일의 지정학적 고전과 군사 전략의 근본적 이념에 반하여 행동하였다.

또한 영국과 미국은 파시즘의 재무장화와 지원 정책을 소비에트 러시아를 견제하는 중요한 요인일 뿐만 아니라,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대륙의 유일한 군사-정치적 선두가 된 프랑스의 지정학적 지향을 억제하는 훌륭한 도구로 간주하였다.


두 번째 질문: 누가 히틀러에게 대부貸付하였나?

독일에서 나치 세력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 간에는 독특한 분업이 존재하였다.

런던은 제3제국에 대한 정치-외교적 보신補身에 중점을 두었다. 이들은 1928년 당시 당원이 10만에 불과하였던 NSDAP을 선두로 격상시키기 위해 진력을 다하였다. 비교하자면: 당국이 매우 싫어했던 독일 공산당은 1923년 가을 약 40만의 당원을 소유했다. 앵글로색슨의 중요 목표는 또한 공격적인 정치적 표주標註가 합법적인 기초에서 군사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1934년 "독일의 군비 동등권 인정을 기반"으로 하는 협상 (나치 수뇌부는 그러한 굴종적 민첩함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음) 이 시작되었으며, USSR은 런던 주재 소비에트 전권사절단 전갈을 통해 이를 잘 알고 있었다3. 이를 위한 수단 중 하나로 크릭스마리네를 프랑스와 이탈리아 함대와 동 배수량만큼 보유할 수 있게 한 앵글로-독일 해군 협정의 체결이 있었으며, 즉 본 협정은 승전국과 패전국인 독일 사이의 동등성을 서류상에 확정하였다.

영미 은행은 히틀러 독일의 방위산업 발전에 재정을 지원했으며, 프랑스 측의 지원을 확보한 런던의 외교술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히틀러의 동방 진격을 장려하였다.

5 영국 귀족사회에서 악수함에 더해 미국에서 환영받는 나치 지도자들. 워싱턴에서 Ya. 샤흐트와 F.D. 루즈벨트. 1930년대

동시에 워싱턴은 주무기인 돈을 성공적으로 사용하였다. 알다시피, "냄새가 나지 않는다". 패전 후 비록 독일 경제는 취약한 상태였으나 상당한 자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미국은 이 나라를 자국 대기업에게 저렴하지만 매우 유망한 투자지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국은 판매 시장을 확대하고, 과잉생산 위기를 회피했으며 1929-1932년 대공황의 여파를 완화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게 없었다 ─ 전형적인 미국식 business as usual 이었다. 뉘른베르크 재판 중 나치 독일 전 제국 경제장관이자 라이히스방크 총재 Ya. 샤흐트가 이하와 같이 증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일의 재무장을 도운 산업가들을 기소하고자 한다면, 당신네들 스스로도 기소해야 한다. 미국인들을 기소하여야 한다. "Opel" 차량공장은 군수품 이외엔 아무것도 생산치 않았다. 이 공장은 당신들의 "General Motors" 소유였다"4.

6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의 공식 후원자.

피고 장관의 말은 미국에서 "듣지 않겠다"고 선택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범죄자조차도 진실을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 중심은 비가역적으로 해외로 이전되었다. 1928년까지 미국의 산업 생산량은 전유럽과 USSR 서부의 생산 총체를 초과하였다. 또한 협상국이 미국 기업들에게 대규모 방위 주문을 배분함에 따라 20세기 초 채무국이던 미국이 유럽의 주요 채권자가 되었다. 미합중국에 대한 전쟁 부채만 하더라도 1918년 가치 기준 100억 달러 (막대한 액수다!) 에 달하였다. 채권국-승전국들이 그토록 배상받길 원했던 독일은 1923년 기록적인 578512%에 달한 소위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영미 금융계는 독일이 청구서를 지불할 능력이 없고 프랑스가 비군사적 경로로 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이 교착 상태를 훌륭하게 활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24년 런던 회의에서 미국이 제시한,독일 배상금 지불을 위한 신규 절차인 도스 계획Dawes Plan이 승인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의 배상금은 10억 금태환 마르크로 절반으로 감소하였다. 1928년이 되어서야 독일의 지불 규모가 25억 마르크까지 증액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J.P. Morgan" 회사에서 마련한 계획에 따라서 독일은 미화 2억 불을 대출받기로 하였다 (그 절반은 모건 가문 은행에 제공)5.

7 C. 도스는 그의 이름을 딴 금융 계획의 설계자이다.

터무니없는 바이마르 서클이라 불리는 극히 기발하고 교활한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유럽국들은 배상금으로 획득한 자금을 우선 미국 차관부터 상환하였다. 따라서 그 돈은 (이자와 함께) 미국으로 다시 반환되었다. 미국인들은 이 금액을 다시금 독일로 송금하였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고금리 대출 형태였다.

도스 계획은 배상 의무 이행에 필요한 정도까지 독일 경제를 복원함을 구상하였다. 도스 계획의 교혜巧慧함은 연합국들이 정착한 전통 시장에 대한 독일의 압력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제"에 대해 연합국에 유리한 해법 창출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이다. 계획 입안자들의 구상에 따르면, 소비에트 국가 시장으로의 독일 상품 유입은 USSR을 경제적으로 병약한 국가로 잔류시키는 확실한 보장이 될 것이었다.

USSR 지도부에게 도스 계획의 반소련 본질은 처음부터 명백하였다. 이에 1925년 12월 18일 열린 VKP(b) XIV 대회에서 I.V. 스탈린은 이하와 같이 지적했다: "...이 계획에서 독일이 러시아 시장을 쥐어짜 유럽을 위해 돈을 흡상吸上해야 한다는 부분은 주인 없는 해법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독일을 포함한 그 어느 나라를 위한 농업국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계와 기타 생산 수단을 스스로 생산할 것이다"6.

미국의 역사가 G.J. 프레파라타가 1970년대 영국 경제학자 D. 알드크로프트의 계산을 사용하여 산정한 대로, 독일은 1924-1929년 동안에만 미국으로부터 150건의 차관을 받았고 (그 중 절반은 단기) 총액은 미화 260억 달러에 달했다7. 배상금 지불에 투입된 금액은 103억 달러에 불과했다; 잉여 자금은 독일 경제로 "확산"되었다. 도스 계획의 실행자 중 한명인 독일 은행가 샤흐트는 1929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독일은 5년 동안,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40년 간 받은 해외 차관만큼 많은 차관을 받았다"8.

그 결과 독일은 융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베를린 주재 USSR 전권사절단 공보국장 D.G. 슈테른은 1929년 자신의 분석 노트에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서술하였다: "배상 문제를 국제 자본의 이익과 결부시키는 경로가 제시되었다; 독일로 하여금 외국 자본이 자국 국민 경제에 집요히 침투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야 할 필연성에 이르게 한 경로이다"9. 국가와 그 산업은 채무로 살아갔다. 워싱턴의 보신이 없었다면 이들은 완전한 파산에 직면했을 것이다. 친숙하고 극히 현대적인 도식이 아닌가?

독일의 군사-산업 잠재력을 복원하는 데에 주로 사용된 앵글로색슨의 차관은 큰 역할을 했다. 1929년 독일의 산업은 이미 세계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였다. 독일인들은 산업체의 주식으로 대출금을 상환하였다. 그리하여 앵글로-아메리카 자본은 독일에 적극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고 독일 경제에서 중요한 부문을 점유하게 되었다. 특히 독일의 유명한 화학 콘체른 "IG Farbenindustrie"는 미국의 "Standard Oil" (즉 록펠러 가문) 의 통제 하에 있었다. "Siemens"와 "AEG"는 "General Electric" (모건 가문) 에 의존하였고, 미국 기업 "ITT Corporation"은 독일 전화망의 40%를 소유하였다. 독일의 야금은 록펠러에 의지했고, "Opel"은 "General Motors" (즉, 듀폰 가문) 의 통제를 받았다. 앵글로색슨은 은행 부문, 철로, 기타 다소 가치있는 독일의 모든 자산을 망각하지 않았다. 종합적으로 제3제국에 "Standard Oil"은 미화 1.2억 달러, "General Motors"는 3500만 달러, "ITT"는 3000만 달러를 투자하였다10.

영국인들도 미국인들에 뒤쳐지지 않았다.

영란은행은 영국의 대규모 경제 주체들이 구리, 알루미늄, 니켈 및 전쟁 산업에 필요한 기타 원자재를 독일에 신용으로 공급하도록 보증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영국 콘체른 "Imperial Chemical Industries" 및 "Vickers"는 독일 군수 산업에 필요한 원자재와 핵심 원료들을 공급하였다. 1934년 말 라이히스방크는 75만 파운드의 대출을 받았다.

1934년 12월 영국 석유 회사 "Royal Dutch Shell" 사장이자 공공연한 나치였던 G.데테르딩과 히틀러와의 회합 후 독일 산업가들과 앵글로-아메리카 석유 부호들 간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후자는 1934년 독일에 연간 소비량만큼의 석유제품을 공급하였다. 특히 캐나다를 통해 공개적으로, 또 비밀 경로로 조달되었다. 자동차 회사 "Rolls-Royce"는 표면상 상업적 목적으로, 히틀러 정부에 전투기에 장착되는 "Kestrel" 유형 신형 엔진을 인계했다. 1934년 4월 "Armstrong-Siddeley" 회사는 영국 엔지니어들이 다년간의 과학-실용적 탐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항공발동기를 독일에 판매하였다. 그리고 1934년 5월 히틀러주의자들은 영국에 이 회사의 강력한 항공기 엔진 80개를 주문하였다. 항공기, 전차, 기관총이 상업적 수량으로 영국에서 독일로 수입되었다. 제국의 재무장이 위험한 치수에 이르렀고 히틀러주의자들이 공식적으로 공군의 재창설과 보편적 징집 도입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영국 정부는 군비 "동등" 공식을 여전히 지지하였다.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반면 미국은 독일에 있는 자회사, 즉 히틀러에게 당대의 최신 기술을 계속 제공하였으며, 이 없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세계 지배 보장에 요구되는 대전쟁을 발발시킴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주로 화학 산업, 중공업, 자동차공업 및 독일 경제의 기타 중요 부문에 해당된다. 1930년대 중반까지 미국 회사는 독일 영토에서 60개 이상의 지사를 인수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미국 자본은 약 300개의 독일 회사를 통제하였다.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세련된 IT 전문가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하는, 강제수용소 시스템에도 미국 IBM의 계수-계산 장비가 사용되었다. 전반적으로 독일은 단기간에 "엔진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었다. 이를 통해 히틀러는 문자 그대로 단 몇 년 만에 독일군의 수를 42배 증강시키며 독일군에게 가장 현대적인 무기를 쥐여줄 수 있었다.


세 번째 질문: 누가 파시스트들을 이념적으로 사육했는가?

1920-1930년대 안개의 알비온영국 당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적 여파를 배경으로 인기를 얻은 초급진적 이데올로기 확산에 의도적으로 기여하였다. 영국에는 친파시스트 조직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전임은 극우 및 민족주의 성향의 다양한 극단주의 단체였으며 국가는 노동 계급의 혁명 운동 탄압에서 아일랜드 독립 지지자들과의 투쟁에까지 온갖 더러운 정치 공작에 이들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8 NSDAP 외교 정책 전권대표 J.폰 리벤트로프가 런던에 도착하다. 1936년 3월 18일

그러나 영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지면은 1932년 귀족이며 백만장자였던 O. 모슬리 종남작從男爵이 지도하는, 다수 소조직에서 결성된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활동으로 남아있다. 1934년까지 영국에는 이 구조 하에 최소 400개 이상의 지부가 있었으며 각 지부는 평균 50명을 포함했다. 전국에서 신문이 출판되었고 The Blackshirt가 선도했다. 이 신문의 표어는 "Britain First" (독일 국가인 "독일의 노래" 첫 줄에 대한 일종의 경의 표현) 였다. 파시스트들은 정치 개혁 프로그램에서 의회 제도의 점진적 철폐, 독재 정권의 수립, 영국 사회의 거의 모든 중요 생활 영역을 국가에 귀속시킴을 선언하였다.

파시스트 연합은 거대 언론 재벌 J. 로더미어 경의 언론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1934년 1월 15일 Daily Mail에 O. 모슬리를 미래의 통솔자로, 그 심복들을 나라의 구세주로 선언한 "Hurrah for the Blackshirts"라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Daily Mirror에 게시된 또 다른 기사에서는 이 파시스트 불한당들을 극히 고상한 말로 추켜세우며 좌파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라 주장했다. 모슬리-로더미어 연합이 무너졌을 때조차도 Daily Mail은 순전히 영국식 현학으로 앵글로파시스트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계속해서 불렀다. 또한 영국 문화의 대표적 거장인 J.B. 쇼가 모슬리를 존경하였다.

9 O. 모슬리의 사상은 영국에서 매우 인기가 많았다. 그는 B. 무솔리니 및 A. 히틀러 같은 선생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 했다.

친파시스트 조직은 영국 총선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지를 확보하였다. 독일 외무부의 한 문건은 국가-사회주의가 왕실, 최고 귀족계급, 성직자 상당부, 왕실 참모부 및 영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른 집단에 극히 우호적이라 기재하였다11.

10 뮌헨에서 N. 체임벌린과 A. 히틀러. 1938년 9월

고위층의 말은 그 행동과 상충되지 않았다. 1933년 나치 집권 이전에도 영국 기득권층과 NSDAP 수뇌부 간의 접촉은 매우 활발했다. 1932년 W. 처칠은 히틀러를 보러 방문할 예정이었다. A. 로젠베르크가 영국에 초청되었고, 그 다음에는 1936-1938년 동안 영국 대사였던 리벤트로프가 초청되었다. 1933년 저명한 보수당원이던 데이비슨 경이 자신의 영지에서 보수당수이자 재임중인 S. 볼드윈 총리와의 회합을 주선하였는데, 그는 이 회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언급하였다12.

영국인은 오랫동안 히틀러를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앵글로색슨과 처음 접촉한 것은 19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시기 그는 뮌헨에서 주독미군 무관 보좌인 트루먼 스미스 대위를 만났다. 특히 스미스는 미국 정보공동체에서 성공적으로 경력을 쌓았고 1935-1939년 간 무관 자격으로 베를린에 귀환했다. 대담자를 칭찬하는 보고서가 워싱턴으로 간 것으로 보아 히틀러가 스미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은 자명하다.

11 H. 포드는 1938년 7월 30일 독일 독수리 대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같은 포상자에는 우스타샤 지도자이자 괴뢰 크로아티아의 독재자 A. 파벨리치, 국가 파시스트당 총재 A. 스타라체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의 총리 H.J 도조가 있었다.

동시에 자금이 히틀러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배경에서 NSDAP에게 선거의 기적이 일어났다. 1928년 당시 의회 선거에서 2.3%의 득표율에 그쳤다. 그러나 1930년 9월에는 막대한 재정 투입의 결과로 18.3% 득표율을 얻어 라이히스탁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32년 1월 미래의 총통이자 제국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와 프란츠 폰 파펜이 몬태규 노먼 영란은행 총재와 대면하였다. 이 대면에서 스웨덴과 스위스 은행을 통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자금을 조달하기로 한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설의 A.I. 마리네스코에 의해 침몰한 독일 최대의 유람선이 스위스에 살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와 히틀러주의자들 간의 실질적 재정 연락책이었던 강경 나치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것은 괜한 일이 아니었다.

12 앵글로색슨의 본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쿠크리닉시, "크로코딜" 잡지. 1949년 33호

다른 많은 예시가 있다. 1938년 여름 미래의 "나치즘의 확고한 반대자"가 된 W. 처칠은 그가 "독일의 힘에 대한 적이 아니며, 대다수의 영국인은 독일이 세계 제2, 제3 강대국 중 하나로 자리잡길 바란다"고 서슴지 않고 선언했다13. 아마도, 영국 정치인들은 히틀러주의의 점증하는 힘의 진정한 실체를 해득하지 못했고, 인종주의에 근거한 끔찍한 테러 계획이 시행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몰랐고 원치 않았다고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것을 실현케 할 모든 일을 했다.

13 영국 선왕은 제3제국에서 최고의 환영을 받았다. 1937년 에드워드 8세의 독일 방문 큐레이터는 NSDAP의 저명 인사이자 독일 노동 전선 총재인 R. 라이 (최우측; 1945년 10월 뉘른베르크에서 자살) 였다.

이 썩은 "타르트"의 "체리"는 1937년 퇴위 이후 윈저 공작 칭호를 받은 에드워드 8세 폐하의 친나치적 견해이다. 1936년 여름 나치가 비무장 라인란트를 점령하였을 때 영국은 (주로 군주의 지시에 따라) 이를 선양煽揚하였을 뿐이다. 왕은 라인란트가 역사적으로 독일에 귀속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히틀러와 특별 조약을 체결하여 라인란트 주의 인구를 책임지기로 약속할 수 있음을 알았다. 1937년 10월 그와 그 아내 W. 심슨 (제3제국에 대한 동정同情으로 유명함) 나치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를 만났다. 더욱이, 영국이 직접 반포한 자료에 따르면,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경우 나치는 퇴위한 에드워드 8세를 복위시키고 그를 영국의 괴뢰 통치자로 만들 계획이었다14.

전반적으로 영국 상류층의 이러한 행동에는 나름의 연유가 있었다. 나치즘의 기본 사상은 게르만이나 아리아인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다. 독일에서의 국가-사회주의 출현과 승리에서 앵글로색슨의 역할은 막중하다. 영국에서는 일찍이 중세와 근세 초 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과의 동일시가 민중들의 의식 속에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 예로, 17세기 영국 혁명의 지도자인 O. 크롬웰은 기독교 세계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영국인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국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간주하였다. 19세기 영국의 대중 의식에서 극단적인 형태의 사회-정치적 민족주의의 토착화에는 전형적인 유대인인 B. 디즈레일리 총리가 본질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는 통상 인권보다 영국인이 타고난 권리가 우선된다는 사상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영국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매혹되었다. 그는 또한 "인종이 모든 것; 그리고 인종을 창조하는 것은 오직 피 뿐"이라 주장한 유럽 최초의 정치인이기도 하다15.

범게르만주의 시대에 존재했던 반유대주의 학파와 인종주의가 지배적인 입장을 실제로 종합한 또다른 아버지-창시자는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H.S. 체임벌린이었다. 일부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그의 유사과학 이론은 논란의 책 "19세기의 기초"에 반영되어 히틀러와 A. 로젠베르크와 같은 나치 지도자들의 주요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J. 괴벨스는 심지어 이 자를 "우리 영혼의 아버지"라 칭했다16.

제3제국의 인종 이론은 역겹고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19세기-20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극히 인기있던, 강제 선택을 통한 인간 개선 교리인 우생학 없이는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지도자였던 C. 다윈의 사촌인 F. 골턴은 영국 우생학 협회를 설립하였다 (영국 우생학 협회는 여전히 존재하며 1989년이 되어서야 대중의 압력으로 골턴 연구소로 이름을 변경함). 그가 주창한 논문은 사회학, 경제학 및 정치학에서 가장 적합한 개체의 자연선택과 생존이라는 생물학적 개념의 적용을 전제로 했다. 이는 이후 나치가 슬라브인, 유대인, 집시 등 모든 다른 민족 집단에 대해 인종 위생 원칙을 실천하고, 인체 실험을 자행하며 절멸시키려 드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인류 진보의 원동력은 인종 갈등이라 주장한 영국의 우생학 교수 K. 피어슨이 독일 나치즘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17.

19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영국 정보부를 위해 다수의 정교한 과업을 수행하였던 R. 키플링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의 사견으로는 영국은 "신의 특별한 은총" 덕에 해외 영토에 대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그 은총의 대가는 영국인의 피였다. 또한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시 "백인의 짐"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서술하며 비유럽 토착민을 미개하고 빈궁하며, 유럽과 같은 더 문명화되고 발전한 선진국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묘사하였다.


네 번째 질문: 범죄자를 "사면"한 이는 누구인가?

양차대전 기간의 어두운 재무 계획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1929년 채택된 영 계획 (상술한 도스 계획의 수정안) 을 실행하기 위해 1930년 바젤에서 국제 결제 은행 (BIS) 이 창설되었고, 본 기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반히틀러 연합 (프랑스, 영국 및 미국) 과 파시스트 블록 (독일 및 이탈리아) 국가 이사들 간의 협력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교류"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독일의 배상금 지급 문제만 다루지 않았다. 독일은 중립국을 통해 전략적 성격을 포함하는 물자를 획득함에 관심이 있었으나 이를 위한 충분한 자금이 부재했다. 이에 BIS는 나치가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포로들로부터 획득한 금을 자유 환전 가능 화폐로 교환하여 스웨덴과 기타 중립국에서 거래하였다.

또 더 자세히 설명하면, 그 정도의 냉소주의는 놀라울 지경이다. 도스, 영 및 다른 이들의 이 모든 계획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결코 비난받지 아니하였다. 그 반대였다. 1925년 C.G. 도스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할 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 영은 2000개 이상의 미국 핵심 기술 대기업이 모인 강력한 미국 소비자 기술 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첨언이 필요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검은 셔츠단" 지도자 O. 모슬리가 다시 활발한 정계 활동으로 복귀하여 1947년 50개가 넘는 소규모 극우 조직과 집단이 포함된 연합 운동 (Union Movement) 을 창당했음은 흥미롭다. 전후 수 년 동안 그는 유럽에서 USSR의 침략적 추향趨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국들을 통합하여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나, 사실 독일 국가 총통과 같은 사상을 "제3제국의 제4제국으로의 환생"을 통해 실현하려 했다. 사후 그 사상은 실제로 실현되었다 ─ 많은 이들이 유럽연합을 진지하게 "제4제국"이라 불렀던 것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연합주의자들의 정치적 의제는 영국의 군사력을 미국 및 소련 수준으로 강화하고, 국제 문제, 국방, 경제 정책, 재정 및 국가 개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유럽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모슬리는 나치 범죄자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소의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영국 최초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중 하나였다. 또 주목할 점이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아니하였다. 그는 심지어 "나의 인생"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영국인은 죽을 때까지 총통을 숭배하였고 1980년 사망하였음).

14 오늘날 무장과 재정을 지원하여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주의를 육성하여 이익을 취하는 이들은 "뉘른베르크 2.0"에서 이에 답해야 할 것이다.

1929년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정치적 경쟁자인 제국 파시스트 연맹을 창설한 영국의 또 다른 불한당 A. 리스의 운명도 나쁘지 않았다. 아놀드 리스는 O. 모슬리보다도 인종 이론의 더한 숭배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럼에도 영국 당국은 그에게 극단주의로 기소하지 않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영국에 구류된 파시스트 운동의 마지막 지도자 중 하나였다. 건강 악화로 1943년에 석방된 리스는 그의 인간혐오적 견해가 녹아든 자신의 잡지 "Gothic Ripples"를 발간하였다.

역사적 과정을 논리 관점으로 보았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은 "궁에서 궁으로"라는 순환 구성을 가졌다.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된 이 전투 행위는 유럽의 궁과 궐에서의 격렬한 외교 투쟁으로 이어졌다. 베르히테스가덴, 휘러바우, 바트-고데스베르크, 파리에서 열린 수 차례의 회합과 막후 협상에서 양측은 몇 가지 목표를 추구하였다. 나치 독일은 강요받은 베르사유-워싱턴 질서의 굴욕적 패러다임에 대한 복수를 갈망하였다. 열강, 즉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세력 확장에 힘입어 "공산주의의 유령"을 제거하고자 했다. 최대로는 침략적 독일의 지향을 동쪽으로 유도하고, 최소로는 "제3국을 희생시키며 침략자와 거래하는 것"이었다18.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지도부를 포함하여 나치의 약취적 열망에 대한 묵인에 당혹감을 표한 모든 이들은 "근장래에 베를린이 당신들을 공격함은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위선적인 선언만을 들었다19.

정치-법리적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1975년 헬싱키 조약에 따른 전후 질서의 공식적인 고착을 무시한다면)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종결되었다. 주로 소비에트 검찰의 노력 덕에 국제 군사 재판소는 반평화 범죄, 반인도적 범죄, 전쟁법 위반 및 이러한 범죄 실행의 음모 혐의로 기소된 다수 고위급 나치들에게 가혹한 형을 판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나치 범죄자들이 유죄를 선고받았는가?

주된 이념적 전쟁광, 징벌 기관의 지도자들에 대해 말한다면 결과는 일견 공정해 보인다. 로젠베르크, 슈트라이허, 리벤트로프, 칼텐브루너, 프리크 등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거의 80년이 지난 지금, 국가-사회주의의 경제적 기반과 파시스트 독일 군사화를 가속화의 기원에 서 있던 이들에게 과분하게도 가벼운 처벌이 내려진 것은 분명하다.

15 쿠크리닉시. 저명한 예술가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소비에트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제3제국의 경제 지도자 중 누구도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제국 군비 및 전쟁 생산 장관 A. 슈페어, 제국 경제부 장관 (1938-1945년) 이자 라이히스방크 총재 (1939-1945년) W. 풍크, 제국 경제부 장관 (1934-1937년) 이자 라이히스방크 총재 (1933-1939년) Ya. 샤흐트, 국가재정관리자이자 SS 최상급집단지도자 (이 지위는 SS 범죄조직 4명에게만 수여됨) F.X. 슈바르츠가 교수대를 피했다. 이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보이지 않는 강대한 세력에 의해 필연적 보복으로부터 보호받았다.

16 A. 슈페어에게 교수형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바로 앵글로색슨과의 연결이었다.

나치즘의 비호자는 누구인가? 답은 아주 자명하다.

1942년 스탈린과의 회견에서 영국 외교관들은 방해공작적 행동으로 나치 정상들을 은밀히 제거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소비에트 지도자는 공개적이고 투명한 재판소 조직을 옹호하며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아니하였다. 전쟁을 일으킨 파시스트 전범들의 운명에 대한 주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온 얄타 회담에서도 상황은 여전했다. 기민하고 교활한 정치인이었던 처칠은 재판에 반대하였다. 루즈벨트는 중간적 입장을 취했다 ─ 재판이 준비될 수는 있으나 단기간에 비공개로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다20. 이 과정에서 대표단은 논의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특별 목록을 작성하였다는 것은 이미 아무것도 아니다. 그 목록에는 뮌헨 협정, 독일 기업과 미국 콘체른 간의 적극적 협력, 19-20세기 영국의 침략적 식민 정책 및 보어인 학살, 독일 도시들에 대한 연합군 전략 항공대의 비인간적 폭격 (이를 배경으로 미국은 괴링을 루프트바페 전쟁 범죄로 감히 비난하지 아니하였음) 등이 있었다.

17 우크라이나로의 서방 무기 공급.

앵글로색슨 국가의 수장들은 공정하고 투명한 재판소가 독일 군국주의와 나치즘만이 아니라 서방 세계 총체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재판 동안 상식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유럽이 베를린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하였을 것이다. 목적성을 가지고 그리하였는가? 누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가? 이 경우 영국 전 외무장관 E. 핼리팩스 경 (침략 유화 정책과 1938년 뮌헨 협정) 과 그 옆의 듀폰, 모건, 록펠러 및 H. 포드 (국가-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통화 및 병참 지원) 에 대한 피고들의 주장은 극히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 앵글로색슨 엘리트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18 오늘날 러시아 연방 무장군은 SVO를 통해 대조국전쟁 당시 우리의 영광스러운 전임자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80년이 지난 지금 나치즘의 발호에 가담한 모든 이들을 심판대에 세우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중하게 고려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특정 영국 혹은 미국 회사들 (이 중 상당수는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 이 나치와 수 년간 협력하며 어느정도의 수익을 가져갔는가? 이 액수를 오늘날의 금액으로 환전하고, 전간기 히틀러주의를 앵글로색슨이 방조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1941-1945년 대조국전쟁 간 소비에트 인민의 대량학살에 대해 "나치-사업가"에게 배상 청구를 해야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 서방의 역사와 히틀러의 나치즘과의 관계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지면을 널리 공개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반복된다. 이기심은 불멸이고, 돈은 여전히 많은 사업가들에게 냄새나지 않으며 앵글로색슨의 도덕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유익한 투자"를 했던 이들은 오늘날에도 도취와 이익을 위해 여전히 그들의 일상적인 숙달기술을 사용하여 우크라이나에서 히틀러의 계승자들을 양육하고 있다. 이들은 신나치,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들에게 점차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르도록 부추기면서도 "백의를 입으려" 노력하고 있다.


다섯 번째 질문: 역사의 판결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역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배우도록 강요하였다: 나치즘은 결코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세기에서 가장 끔찍했던 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승리하여 인류에게 평화롭고 안정적인 발전의 기회를 선물했고 전인민 학살을 통해 세계 지배를 꿈꾸든 온갖 침략자들의 꿈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흑사병은 빛이나 공기가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숨어든 간균이 오래도록 생존할 수 있는 질병이다. 불행히도 이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해당된다.

인류는 노력을 규합하고 수십만의 목숨을 희생하여 선페스트라는 치명적 역병을 억제할 수 있었다. 갈색{파시즘의 은유 ─ 역자 주}의 중무장한 이종도 근시일 내에 고립되어 마침내 멸종할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는 이를 역사적 사명으로 본다. 우리는 지구의 대다수, 즉 자칭 "황금 억만장자"의 명령 하에 살고싶지 않고, 스스로 독립적인 길을 개척하며 모든 민족과 국가에 대한 평등한 권리와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관계를 구축할 준비가 된 국가의 시민들로부터 지지받고 있다.

19 새로운 다극 국제 관계 체제 구축의 주 과제는 마침내 선을 긋지 않고 진정으로 정의로운 세상에 다가가는 것이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과거로부터 배워야 할 쓰라린 교훈이 있다. 감염의 전조와 최초 증상을 명확하게 진단하여야 한다. 범지구 조직에 필요한 치료를 적시에 일관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외교적 요법에 의존하지 않고 외과적 경로로 위험한 병소를 배제한다. 특별 군사 작전의 종료, "우크라이나 국가"로 불리는 영토의 탈나치화는 국제 관계의 새로운 아키텍처로 향하는 길고 어려운 여정에서 첫 번째이지만 극히 중요한 걸음이다. 이 행성의 안보와, 모든 나라와 수십억 인구의 안녕을 보장하는 범지구 도구 창설을 지향한다.

우리는 과거의 실수와 망상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상상의 동맹에 대한 환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그들의 말과 거짓된 단언의 가치를 잘 알게 되었다. 파시스트와 그 공범자들은 새천년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 ─ "¡No pasarán!". 틈새도, 양보도, 변명도 없다. 설욕의 기회도 없다.

신나치주의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집단 서방의 침략과 파시스트의 설욕 시도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이 합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동지 및 동반자들과 함께 압력과 억압, 다른 국가를 희생하는 일부 국가의 격상, 전인민의 굴욕과 착취, 신식민주의적 거동과 범죄적 사업계획이 들어설 곳 없는 새롭고 공정하며 다극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향후 "뉘른베르크 2.0" 과정에서 "경작된" 괴물의 양육과 경제 지원으로 이익을 보는 서방의 방산 기업, 금융 조직, 운송-물류 회사 및 개별 사업가들의 이익을 계산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이들을 위해 피고인석을 예약하여야 한다. 누군가의 피와 눈물, 폐허가 된 집과 운명의 잔해, 무고한 이들의 공포와 고통, 전세대의 짓밟힌 미래를 통해 은행 계좌가 잔뜩 부풀어오른 누군가를 정죄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제 선고된 모든 형을 집행하여 죄인 중 누구라도 응보를 피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특별 군사 작전이 완료되면 정의가 직접적 가해자인 키예프 정권 지도자만이 아닌, 그들의 주인, 후원자 및 이념적 추동자들에게도 집행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이는 앵글로색슨 세계의 잘못된 가치 체계의 최종적인 일몰을 의미할 것이다.


드미트리 아나톨리예비치 메드베데프
러시아 연방 안보평의회 부의장


각주


  1.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кануна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1937–1939. Т. 1. Ноябрь 1937 г. – декабрь 1938 г. / М-во иностр. дел СССР; редкол.: И.Н. Земсков и др. М.: Политиздат, 1981. С. 35.

  2. Безыменский Л.А. Гитлер и Сталин перед схваткой. М.: Вече, 2000. С. 28.

  3. АВП РФ. Ф. 069. Оп. 18. П. 55. Д. 6. Л. 87.

  4. Полторак А.И. Нюрнбергский эпилог. М.: Воениздат, 1965. С. 496.

  5. Большая совет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В 30 т. 3-е изд. Т. 7. М.: Совет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1972. С. 562

  6. Сталин И.В. Сочинения. Т. 7. М.: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политиче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1952. С. 272.

  7. Препарата Г.Дж. Гитлер, Inc. Как Британия и США создавали Третий рейх ; пер. с англ. А.Н. Анваера. М.: Поколение, 2007. С. 251.

  8. История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1941–1945 гг. Т. 1. Подготовка и развязывание войны империалистическими державами. М.: Воениздат, 1960. С. 4.

  9. АВП РФ. Ф. 082. Оп. 14. П. 55. Д. 29. Л. 20

  10. Хайэм Ч. Торговля с врагом. М.: Прогресс, 1985. С. 11

  11. Documents on German Foreign Policy, 1918–1945. Series C. Vol. I. Washington, 1957. P. 752–753.

  12. James R. Memoirs of a Conservative: J.C.C. Davidson’s Memoirs and Papers, 1910–37. London, 1969. P. 399.

  13.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кануна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1937–1939. Т. 1. С. 124.

  14. https://www.telegraph.co.uk/news/2017/07/20/sir-winston-chur-chill-tried-supress-secret-war-documentsdetailing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4.04.2024).

  15. Саркисянц М. Английские корни немецкого фашизма. От британской к австро-баварской «расе господ»; пер. с нем. М. Некрасова. СПб.: Академический проект, 2003. С. 91.

  16. Там же.

  17. Саркисянц М. Английские корни немецкого фашизма. С. 40

  18. АВП РФ. Ф. 069. Оп. 23. П. 66. Д. 4. Л. 6.

  19. Документы по истории Мюнхенского сговора. 1937–1939 / М-во иностр. дел СССР; М-во иностр. дел ЧССР. М.: Политиздат, 1979. С. 47.

  20. https://rg.ru/2011/12/01/nurnberg.html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2.0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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